시사이슈

김대중과 노무현-서프라이즈

김포대두 정왕룡 2009. 8. 20. 23:31
김대중과 노무현
(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09-8-20 15:11)



김대중과 노무현

(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09-08-20)

 

노무현과 김대중, 현대정치사의 두 거목이 백일 간격으로 사라져갔다. 어쩌면, 가카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타나 ‘잃어버린 10년’을 외치기 시작했을 때, 다만 시간문제일 뿐 이 사태는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두 대통령의 연이은 서거가 상징하는 바는 같다.

노무현과 김대중은, 만약 가카들이 설쳐대지 않았더라면, 즉 두 사람이 민주주의의 붕괴나 80년대로의 회귀 따위를 걱정하지 않게끔 만이라도 되었었더라면, 이 척박한 토양에서는 최초로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의 롤 모델을 참으로 열심히 만들어내고 있었을 거다. 지금까지도.

거 보라. 전두환과 김영삼은 최악의 대통령들이었지만 아직 멀쩡하지 않은가. 전두환도 제 입으로 말했었고 사람들도 확실히 인정하고 있듯이, 저 전직들은 ‘잃어버린 10년’, 즉 자신들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 그리고 그의 “반쪽”인 노무현 시절을 가장 즐긴 자들이다. 이거, 역설을 넘어 명백한 무임승차다.

<베다경>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언표한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각각 시대의 진리를 언표한 사람들이다. 그 진리는 단 하나다. 뭔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이고, 노무현은 ‘참여정부’다.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다르게 표현된 것일 뿐, 두 정부는 단 한가지의 진리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권력은 국민의 것이라고. 역사상 처음으로 - 이것 역시 매우 역설적이다 - 기득 숙주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하는 그 기간 동안, 권력은 국민의 품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국민은 그 권력을 빼앗겼다. 아니, 스스로 반납했다. 그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이 손에 쥐어 준 그 권력을 오히려 거추장스러워 했다. 왜?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 그 방법을 제대로 몰랐었고(그것을 알려면 공부를 꽤 많이 해야 한다), 특히 권력의 행사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책임 하에 행해야하는 그런 것.

 

권력을 쥔 국민들이 몰랐던 또 하나는, 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승리의 기쁨에 들뜬 나머지 그것에 만족해버리고, 저 숙주들이 반격을 해 올 것임을 깨우치지도 대비하지도 못했다. 공부하지도 조직하지도 못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으로부터 받은 그 권력을 지켜내는 게 어렵다는 것이 바야흐로 입증되었을 때, 국민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그렇게 싸우는 것이 귀찮고 괜히 손해만 보는 것 같고 더구나 ‘돈 되는 일’도 아니니 그 저항을 포기하느냐 하는 것. 물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국민들은 후자를 택했다. 대통령‘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대통령 ‘가카’에게 헌납해 버린 것이다. 대신, 그들은 가카들의 계시를 믿고자 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에 동의해라. 권력을 내놔라. 그렇게 하면, 너희들의 아파트는 건사할 것이요, 잘하면 뉴타운에도 들여보내 주리라~”

김대중과 노무현이 국민들에게 내어주고자 했던 그 권력은 국민들에게는 아직 낯선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낯설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봐 와서 익숙해진 가카들의 ‘권력 질’에 그렇게도 쉽게 낚여버린 것이다. 국민들은 아직, 자기 것임이 분명한 민주주의의 권력을, 행사할 준비도 또 그에 필요한 공부를 할 자세도 되어있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가카들이 마음 놓고 민주주의를 내팽개치고 있는 이때, 대체 김대중과 노무현이 무사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그들의 죽음은 이렇게 시사적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두 거목의 서거가 공통적으로 상징하는 바다. 그러나 양자가 진리를 나타내는 방법은 달랐다. 시대적 배경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전직 대통령과 그 죽음의 차이를 알아내야만, 두 사람의 역사적 의의가 분명하게 나타나며, 가카들의 본질도 꿰뚫어 볼 수 있다. 가령, 양자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나타난다.


● 김대중 대통령은 ‘국’장 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장이다.

●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다.

●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행동하는 양심”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비문에 남긴 말은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 김대중 대통령은 국립 현충원에 묻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고향에 누워있다.


이 차이점들은 사소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카들은 DJ의 국장에 거의 ‘흔쾌히’ 동의했다. 왜 그렇겠는가. DJ의 민주화 공적, 남북화해 정책(및 그에 따른 노벨상 수상)을 인정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저들은 김대중의 업적을 인정할 의사가 눈곱만치도 없다. 그렇다면, 왜 ‘최대한 예우’하면서 국장을 허용했겠는가. 그것은, 김대중을 끝으로 “공식적으로 그 얘기를 그만 끝내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떤 얘기? DJ를 이어받은 그의 반쪽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하던 바로 그 얘기, 국민들에게는 낯설고 그리고 가카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온 그 실험들 말이다. 가령 지역주의 청산, 권력집중 해체(균형발전), 언론개혁, 과거사 청산...다시 말하면,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만들어내고 그 힘만이 지켜낼 수 있는 그런 진짜 민주주의.

 

가카들은 김대중의 죽음으로 ‘민주화 운동’의 상징 3김 시대를 회고나 하면서, 이제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이니 까짓 그 얘기는 그만 하자고 한다. 언제 욕했느냐는 듯이 통합과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래서 김대중은 ‘국’장이 된 것이다. 김대중의 장례를 준비하는 ‘국가’는 지금 ‘차분’하다. 하지만 노무현의 빈소를 자기 손으로 직접 차리고, 옆에 있는 ‘공식’ 분향소를 마다하고 허리 끊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4~5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대한문 분향소을 고집한 ‘국민’(상주)들은 ‘분노’로 들끓는다. 그들은 외친다. “얘기를 여기서 끝내자고? 천만에, 안되지. 노무현이 하고자 했던 진짜 민주주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부터야.” 가카들은 DJ를 끝으로 사태를 종결시키고자 하지만, 국민상주들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히) 아직 미완성이고 진행형이다. 그래서, 가짜 민주주의한테 죽임을 당한, 노무현은 ‘국민’장이다.

 

1997년 김대중이 역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일궈냈을 때 거기에도 물론 ‘국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국민들은 뚜렷한 정치의식도 조직된 힘도 없었다. 참여해서 민주주의를 완성하자는 개념자체가 없었다. 정권만 교체해 놓으면 다인 줄 알았다. 다만 김대중이 ‘병역비리의 온상’ 이회창보다 상대적으로 나아 보였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김대중의 진짜 모습, 그 위대성을 잘 몰랐다. <국민의 정부>에서의 ‘국민’은 ‘정치의식으로 무장한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때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또 매우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이 <참여정부>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노무현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없으면 그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참여’와 ‘소통’을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80~90년대는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행동하는 양심’만 가지고는 민주주의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노무현은 말했던 것이다.


가카들은 김대중의 의의는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해도, 김대중이 그렇게도 싫어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럴듯한 민주주의의 겉모양은 유지하면서 묻지마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하여(그리고 이제부터는 선동수단으로 전락할 미디어의 충성을 받아) 영구 집권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DJ가 상징하는 1987년 민주화는 가카들이 마지못하더라도 인정은 가능한, 즉 허용 가능한 임계치다. DJ가 ‘국립’ 현충원에 묻히는 것도 그래서다. 구시대적 인물들과 나란히.

 

하지만 노무현은 이 임계치를 뛰어넘고자 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야 한다던가. 노무현은 구시대의 막차로서 새 시대의 첫차가 되려고 했다. 노무현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한번도 제대로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실험 - 그것이 뭔지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 을 하려고 했다. 그것은 가카들에게는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될 지점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부엉이 바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김대중의 죽음을 핑계로(그리고 국가가 마련한 ‘정중한’ 장례를 통해) 구시대의 상주들은, 그것으로 진리는 '국가가 공인하여' 완성된 것이므로 “더 이상은 없다”고 선언하려 한다. 그러나 노무현을 상징하는 국민장의 시민상주들은 “그게 진리가 아니요!”라고 선언하고 있다.

시대가 그에게 부여한 과업을 완수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역사 속으로 쉽게 떠나보낼 수 있다. 이제 그를 다시 보려면 역사책을 뒤져봐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 분노해야 하고 노무현을 대신해서 싸워야 할 일이 무지하게 많은 ‘조직된 시민’들은 여전히 노무현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은 그가 실험을 하던 바로 그 곳에 지금 누워있다. 그를 역사 속으로 보낼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두 거목의 죽음은 이렇게 같고, 이렇게 다르다.

 

(cL) 초모룽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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