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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단 대진항에서 -누리네 동해안 ‘후다닥’ 여행기(3)-

김포대두 정왕룡 2006. 3. 12. 14:01
최북단 대진항에서 -누리네 동해안 ‘후다닥’ 여행기(3)-

 

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최북단 대진항 선창가에 내려섰다.

새벽출어후에 귀향한 배에서 내려진 생선들을 그물망에서 걷어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예전같이 흥청거리지는 않지만 새벽일 하러 나온 동네 아낙들이 여기저기서 그물을 매만지며 바쁜 손놀림을 연출한다. 펄떡거리는 생선들이 가뿐숨을 몰아쉬며 자신앞에 놓여진 운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경매에 붙여져 어디론가 실려간다.

‘최북단 항구’

대진항에 꼭 따라붙는 수식어 세글자다. 금강산이 지척의 거리에 놓여있고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한밤중엔 북한의 대남방송 소리가 선동적 음악에 실려 들려오던 곳이다. 어로작업중 파도에 떠밀리거나, 혹은 고기를 더 잡을 욕심으로 조금 더 나아갔다가 북한 수역으로 넘어가 버리는 사고가 빈번한 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엔 북방 어로한계선이 그어져 있다. 밤이면 언덕에 위치한 철탑에서 어로한계선을 알리는 불빛이 바다를 향해 쏟아지고, 한낮에 안개가 밀려들면 기차의 기적음 비슷한 굉음이 일정간격으로 내뿜어진다.

언덕위 해안경비 초소를 올려다 보았다.

거의 일년 가까이 군대근무를 하던 곳이다. 여름에 시작하여 겨울을 꼬박나고 그 이듬해 다시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내륙으로 철수하기까지 군대생활의 중요한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때엔 민간인을 통제하고 어선의 입출입을 확인하곤 했는데 이젠 내가 거꾸로 통제대상인 민간인의 신분이다.

해안근무는 낮이 아니라 밤이 주무대다. 간첩을 잡는게 주임무다. 그들이 들어올 가능성이 가장 큰 시간대가 한밤중이고 그래서 낮엔 자고 밤엔 근무하는 올빼미 생활의 연속이다.

‘간첩 한마리 잡아서 제대해보자’

군생활당시 외쳤던 구호가 연상된다. 간첩은 우리에겐 한 마리 두 마리 숫자놀음의 대상이었다. 제대할 때까지 포상휴가 보내준다는 상급자의 말에, 행운을 안겨줌과 동시에 그만큼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들도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고 만일 남반부에 태어났다면 ,아니 분단의 상황만 아니라면 어깨를 같이하는 전우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그때는 사치나 감상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한겨울철 실탄이 장전된 M16 소총을 들고 선착장을 순찰할 때 밤바다 파도에 밀려오는 시름은, 한산섬 달밝은 밤 충무공의 고뇌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제법 심각한 것이었다. 내가 들고있는 총이 ‘애국’이라는 명분아래 군사정권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항상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갈등의 요소였다.

5공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치뤄진, 85년 2.12 총선의 여파는 이곳 대진항 해안초소까지 밀려들어왔다. 중대장이 사병들을 초소에 모아놓고 민정당을 찍어야 나라가 산다며 두 눈을 부릅뜰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닌 군부 공화국’이었다. 중대장은 투표함에 용지를 넣기전 기표내용을 반드시 자신에게 보여주고 넣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럼에도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야당후보에게 기표를 했다. 투표용지를 바라보던 중대장의 일그러진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거당일 저녁, 선창가 부두를 순찰돌던 중, 한 어촌가옥의 창문사이로 들려오는 야당의 선전소식은 마음 한쪽으로 환호를 내지르게 만들었다.

어느날 근무를 마치고 철수해보니 ‘선진국군’이라는 책자가 내앞에 놓여 있었다. 전두환의 어록집이었다. 내용을 들여다보니 차마 읽기에도 역겨운 전두환 찬양집이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고참병이 다가와 건넨 말이었다. 그것을 읽고 감명받은 내용에 대해 독후감을 써내라는 것이었다. 다른 부대에서는 웅변대회도 개최한다고 했다. 나의 일그러진 표정에서 어떤 낌새를 느꼈는지 우리 초소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며 사정하다시피 한다. 그당시 말도 안되는 내용을 원고지에 어떻게 써내려 갔는지 기억이 제대로 안난다. 아니 애써 잊어버리려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근무지 참호에서 바라다 본 밤바다의 파도는 참으로 우울했다.

겨울 밤바다에 내리는 눈발은 초병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든다. 함박눈이 그치고 달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백사장의 풍경은 개짖는 소리마저 밤의 교향악으로 흡수해 버린다. 그 고요함을 배경으로 설경에 반사되는 달빛을 벗삼아 몰래 숨겨온 편지지를 꺼내 글을 써내려 갈때는 시인이 따로 없었다. 이런때 간첩이 온다면 해안 철책 너머로 끝없이 널려져 있는 명태덕장의 황태 몇 마리 안주삼아 술한잔 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진항은 요즘 동해안 어느 항구나 그렇듯이 고기잡이가 예년 같지 않다. 더구나 손에 잡힐 듯 지근거리에 있는 휴전선 인근의 황금어장을 두손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민들에겐 분단의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다행히 남북협력의 물꼬를 튼 금강산 관광이 열리고 철도와 도로개통을 눈앞에 둔 지금, 대진항 포구는 희망의 설레임이 뚝뚝 묻어난다. 통일의 그날엔 대진항도 ‘최북단’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군대시절의 아픔을 뒤로하고 딸아이와 함께 발길을 돌리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아직은 무겁기만 하다.

   
   
   

 

입력 : 2005년 09월 28일 18:25:36 / 수정 : 2005년 09월 28일 18: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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