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1818년 음력 9월에 57세의 나이로 정든
고향으로 돌아온 중년의 노인 다산은, 75세까지의 18년의 세월을 한가롭게 사랑하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다산보다 한 살 위이던
아내 홍씨와의 부부생활도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장성한 아들 두 사람도 30대 중반을 넘은 장년의 어른이었고 딸 하나는 이미 시집가서
모두 자녀를 두었던 처지였습니다. 친손자도 있고 외손자도 있던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72세가 된 극노인이던 다산은
가난이 흐르고 기아에 시달리던 강마을에 봄이 오자, 아름다운 자연을 읊기도 했지만, 그 때 백성들이 당하던 고통에 대해서도 눈 감지 않고 삶의
아픔을 노래했습니다. 처절한 강촌의 흉년에 어부들이 시세(時勢)를 만났다던 지난번 시도 좋았지만, 가난한 농가의 모습을 그린 이번의 시도
아름답고 애처롭습니다.
봄바람
불자 푸른 풀이 파릇파릇
꽃과
버들도 그냥 옛날과 같으오나
다만
적막한 내 삶이야 봄이 오니 더 심한데
차가운
연기에 쇠락한 농가 낮이 길기만하네
東風吹綠草離離
花柳依然似昔時
只是寂寥春更甚
冷煙衰屋日華遲 <荒年水村春詞十首>
풀과 꽃, 버드나무도 예전처럼 푸르고 곱게 피어나건만, 늘그막의 적막함은
예전보다 훨씬 더 심해진다는 다산의 심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흉년 든 농가의 풍경도 정말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불을 땐들 찌고 삶을 것이 없어
연기만 냉랭한 모습이고, 찌든 농가에는 봄날의 햇볕만 오래오래 길게 비추어 기아와 주림이 더 견디기 힘듦을 비유하고 있으니 거기에 또 가난이
흐르고 있음을 짐작케 해줍니다.
이제 부자가 된 우리나라, 춘궁기도 없고 ‘보릿고개’도 없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봄의
꽃과 버들도 곱고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니, 시대와 세월의 아픔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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