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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2인자, 이기붕의 슬픈 초상-누리네 동해안 '후다닥'여행기(7)

김포대두 정왕룡 2006. 3. 25. 19:05
권력 2인자, 이기붕의 슬픈 초상-누리네 동해안 '후다닥'여행기(7)

 

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

화진포 김일성 별장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이기붕 별장으로 연결된다. 안내팻말에 이기붕 ‘부통령’이라는 호칭이 영 어색하다. 그냥 ‘이기붕 별장’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텐데 굳이 ‘부통령’이라는 호칭을 붙여야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도 그럴것이 이승만과 함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3.15 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가 그 다음달에 4.19혁명으로 쫓겨났으니 과연 그에게 ‘부통령’이란 호칭이 적합할지 의문이다.

‘이박사는 괜찮았으나 그 주변사람들이 인의 장막을 가려 그를 망쳐놓았다’


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는 이 말속에서 그 주변사람들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이기붕이다. 1945년 해방직후 이승만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여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국회의장등 안해본 자리가 없는 그다.

민의원 의장시절엔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안을 번복, 가결한 사람도 바로 그다. 그가 이렇게 이승만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승만 부인 프란체스카와 밀접한 친분을 유지했던 부인 박마리아의 도움이 컸다. 급기야는 그의 큰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들여보내기까지 했으니 봉건왕조시대에 비유해보자면 대권승계의 발판까지 마련했던 셈이다.

 

그야말로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인자는 2인자일 뿐이다. 2인자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림자는 본 실체가 없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는 법, 이승만의 몰락과 함께 그의 운명도 종지부를 찍었다.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사용되던 건물로서 해방이후 북한 공산당의 간부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이후 이기붕씨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하다가 폐쇄되었으나……’

 

안내현판에 새겨져 있는 글씨를 따라 읽어 내려가다 보니 외국인 선교사, 공산당 간부, 이기붕 부인 박마리아등 이곳을 거쳐간 주인들의 이름이 눈가에 겹쳐진다.

이기붕 그의 권력으로 보자면 굳이 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쓰이던 이곳보다도 김일성 별장을 접수하는 것이 좋았을 거다. 그런데 전망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평지에 별장자리를 잡았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언덕 위 이승만 별장을 올려다 본 뒤에야 그 궁금증이 비로소 풀렸다. 2인자의 위치에 서있는 그가 1인자와 대등한 위치에 있거나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승만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을게다. 이승만에게 큰아들까지 보내버렸던 그다.  하물며 별장의 위치나 높이정도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그에게 없지 않았을 거라는 논리비약을 감히 해본다.

 

   
‘집무실’이라는 글자가 써있는 전시관 내부로 들어갔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이승만과 이기붕 액자가 나란히 걸려있다. 제왕처럼 당당하게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이승만에 비해, 웃는 모습의 이기붕  얼굴에 웬지 모를 쓸쓸함이 배어있다.

 

전시관 안에는  초상화부터 시작해 이승만과 관련된 유품들이 즐비하다. 이곳의 주인이 이승만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이기붕의  약력소개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내용들은 ‘4.19 혁명’과 그의 종말에 대한 설명이다. 자신의 수하였던 대표적 정치깡패 이정재의 이천 지역구를 강탈해 가면서까지 국회의원 의석을 얻었던 그다.  ‘사사오입’이라는 희한한 억지논리를 만들어 이승만을 종신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다. 그러기에 부정선거의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까지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부통령에 당선된 3.15 당시, 그는 또한번 권력의 단맛에 취해 있었을 테다.

 

그러던 그가 한달 후 4.19가 일어나자 갈 곳이 없었다. 4.19당시 그는 일가족을 이끌고 경무대로 피신한다. 그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곳은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 말고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이승만 마저 하야를 해버리고 망명길에 올랐으니 대한민국 천지에 그와 그의 일가족이 발붙일 곳은 아무데도 없었던 셈이다. 결국 큰아들 이강석이 겨눈 권총에 의해 일가족이 잇달아 생의 마침표를 찍고 만다.

“아빠, 이 아저씨는 무슨 나쁜짓을 했길래 이렇게 죽었어?”
‘이기붕 일가의 종말’이라는 게시물 앞에서 딸아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본다.

“응, 제일 윗자리에 있다가 내려오기 싫어서 욕심부리다가 저렇게 되어 버렸어”

알듯 말듯 딸아이는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김종필, 차지철, 노태우, 박철언, 권노갑’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권력과 함께 부침을 거듭했던 2인자들의 이름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들은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천하를 호령했지만 그 후  하나같이 불행한 종말을 맞았거나 쓸쓸한 마감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유비옆의 제갈량이나 모택동 옆의 주은래같은 인물이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 현대사의 또하나의 비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며 발걸음을 옮겨본다.

화진포의 상징인 해당화의 붉은 열매가 나를 보며 빙긋 웃고 있다.

   

 

입력 : 2005년 10월 26일 11:46:14 / 수정 : 2005년 10월 26일 11: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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