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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은 화가를 만든다 - 양양기행 (1)-

김포대두 정왕룡 2008. 2. 5. 00:31
 
 
   
‘누리가족 출석’
낙산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해변으로 달려갔다. 파도와 백사장이 만나는 경계선에 자리를 잡더니만 이내 작업을 시작한다. 도화지나 캔버스가 따로 없다. 붓도 필요 없다. 그냥 손으로 휘갈긴다. 무슨 작품을 만드는가 싶었더니 하트를 그리고 그 옆에 글자를 새긴다.

학교수업을 빼먹고 동해안까지 달려온 게 약간은 맘에 걸리는 걸까?


누리가족 ‘출석’이란다. 하긴 ‘현장학습’이라는 명목으로 평일에도 가족 나들이를 수업으로 인정하는 세상이 됐다. 그럼에도 아이는 바닷가 한복판에 ‘출석’이라는 말을 새겼다.  유달리 동해바다를 좋아하는 아이엄마를 따라 틈틈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아이에게도 이곳은 학교와 같은 익숙한 곳이 되어버렸나 보다. 그런데 그 앞에 ‘가족’이라는 말이 눈에 더 띤다. ‘자격지심’이란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걸까?  ‘출석’보다는 ‘가족’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찍혀있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족끼리의 만남을 소홀히 한 아빠의 모습을 질책하는 투다.

 

아이엄마는 제법 찬 기운이 도는 해변에서 아이가 물에 젖을까 염려하는 모습이다. 너무 물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 말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힌 바깥쪽 백사장은 자신의 작품을 그릴 도화지가 없다는 투다. 끊임없이 파도와 모래가 포옹하여 만들어내는 여백이 존재하는 그곳이 자신의 화실이라도 된다는 듯 벗어나지 않는다.

 

   
   

파도가 빗질하듯 아이의 작품을 쓸어버렸다. 속상할 법도 한데 아이는 ‘뭐 그게 대수냐’는 투다. 다시 물가에 다가가더니 하트를 또 그린다. 이번에는 하트 한복판에 뭐라고 쓰는 것 같다. 호기심에 들여다봤더니 ‘사랑’이라는 말을 그 안에 새겨 넣었다. 이번에는 하트 바깥 양쪽에 날개도 달아 넣었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두둥실 날아오를 듯하다.

 

 하트 자체가 사랑의 상징인데 아이는 그것도 모자라 안에다가 글자를 새겨 넣었다. 거기에다 날개는 왜 매단 것일까? 사랑의 날개를 달고 온 가족이 함께 하늘로 떠오르자고 한 것일까?

 

아이가 다시 손 붓을 들었다. 힘차게 한 획 한 획 그림을 새겨 넣는다. 작업을 마쳤는지 아빠를 보며 씩 웃는다. 나름대로 공을 들였는지 이마에 땀을 닦아낸다. 이번에는 무슨 작품일까? 다가가 봤더니 역시 가족 그림이다. 세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손이 닿을 듯 말 듯 나란히 서있다. 머리가 큰 사람이 아빠인 것 같고 그 옆에 엄마와 자기를 그려 넣었다. 단순한 그림인데도 찐한 감동이 다가온다. 아이에겐 ‘가족’이라는 단어가 울타리이고 힘이 되는 것 같다. 함께 잡은 손으로 연결된 그림이 하나이면서도 셋이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그려 넣었나?
네잎 클로버가 새겨져있고 그 옆에 ‘모두 행운’이라는 말이 쓰여 있다. ‘모두 행운’이란다. 그 ‘모두’에는 가족뿐만이 아니라 친구들을 포함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아이가 그림에 몰입하는 사이 어느새 주변에 짙게 어둠이 드리워졌다. 더 이상 그림 그리는 게 불가능해졌다.  아이는 해변의 가로등을 벗 삼아 야간작업을 할 태세지만 엄마의 만류로 손을 턴다.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신발에 모래가 잔뜩 들어가 있고 바지는 반쯤 젖어있다. 모래를 털어내며 엄마 얼굴을 쳐다보는 아이 얼굴에는 약간의 걱정이 스쳐간다. 그러다 씩 웃는 엄마 얼굴을 보며 안심이라는 듯 이내 표정이 밝아진다.

 

 

근처 군인초소에서 돌리는 야간 탐조등이 해변을 휘젓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그러한 풍경이 긴장감을 안겨주었는데 지금은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된 꼬마전구 같다. 해변 백사장 곳곳엔 황색 가로등이 저마다 키재기라도 하듯 높이를 다투며 허공에 매달려있다. 머얼리 등대불빛이 깜박인다. 이제는 어두움을 토해내는 밤바다가 검은빛의 지루함을 달래보려는 듯 수평선 한가운데 오징어 고기잡이 어선불빛을 군데군데 매달아놓았다.

 

아이가 해변에 작별인사를 했다. 바다는 그저 말이 없다. 또 만날건데 뭐 그리 아쉬워하냐는 투다. 바다는 아이에게 도화지를 선물했다. 아이는 그 위에 꿈을 그렸다. 파도는 그 그림을 쓸어가 버렸다. 꿈은 끊임없이 다시 그리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파도는 말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