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을 못 본 것을 아쉬워하는 아이를 위로하려 한마디 던졌지만 나 역시 그런 느낌은 마찬가지다.
‘왜 바다에서 맞이하는 해돋이는 다른 곳과 달리 특이한 느낌을 주는 걸까?’
해변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다.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수평선은 누가 보더라도 해돋이를 단념하라고 소리치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쉬움 속에 백사장을 이리저리 오간다. 매일같이 모습을 드러내면 신비로움이 없어진다는 듯, 오늘은 구름병풍 뒤로 잠시 쉬고 싶다고 수평선 너머의 해님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낙산의 아침은 그렇게 회색빛으로 다가왔지만 파도는 여전히 푸르고 흰 빛을 토해내기에 여념이 없다. 바닷가의 주인공은 태양이 아니라 자기인데 사람들은 왜 그리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듯하다.
파도에게 위로의 말과 함께 작별을 고했다.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다. 하룻밤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마치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순간처럼 아쉬움이 묻어난다.
‘양양 오산리 선사박물관’
짐을 꾸려 해안을 따라 남행을 시작하였는데 여러 번 눈에 띠는 안내팻말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정교하게 짜인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보다 가다가 눈에 띠는 곳에 잠시 짐을 풀고 우연한 만남을 즐기는 게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양양 오산리 선사박물관’은 그렇게 예기치 않게 다가왔다.
그런데 안내팻말을 따라가다 보니 진입로에서 뜻하지 않은 친구들을 만났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갈대밭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물결을 토해내는 갈잎의 무리들이 수천수만의 아우성을 토해내고 있다. 마치 철새들의 거대한 군무를 보는 느낌이다. 생전 처음 보는 갈대의 장관이다. 실바람에도 하늘거린다는 갈대가 거대한 군집을 이루니 그들이 각자 뿜어내는 바람소리가 묘한 신비감을 안겨준다. 자연의 교향악이라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누가 감히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표현했을까?
연약함과 변덕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진 갈대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오늘 보는 이 풍경은 그러한 표현이 속 좁은 인간들의 한낱 자기중심적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 나오는 아늑하고 정겨운 ‘갈잎의 노래도 오늘 이곳에서는 부분적인 표현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방금 전 푸른바다를 보고 왔는데 여기에서 또 바다를 본다. 그런데 지금 보는 바다는 갈색바다다. 푸른 파도 대신 은빛갈잎들이 장관을 이룬다.
문득 저 갈잎의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가 보지만 갈잎들은 더 이상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의 손길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동해안에 몇 남지 않은 자연의 영역을 건드리지 말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다. 인간들은 처음에는 다정하게 다가왔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욕심을 드러내며 자연을 할퀴어버린 존재라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 같다.
주변을 보니 ‘갈대보호’라는 팻말이 서 있다. 자연을 망가뜨린 인간들이 그나마 자기위안용 생색을 내기위해 세워놓은 것 같다. 마치 백인들이 세워놓은 인디언 보호구역 팻말을 보는 느낌이다. 한순간 그렇게도 멋지게 느껴지던 갈대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가엽기 그지없다.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흐드러지게 춤추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동해안 변방 보호구역 같은데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인간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장식품이 아니라오. 우리도 당신들 못지않게 자연을 구성하는 당당한 일원인 것을 왜 모르시오. 그렇게 동정어린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지 말구려. 우리를 자연의 중심에서 몰아낸 당신들의 손길이 결국은 당신들의 2세에게 미칠 영향이나 염려하시구려.’
바람소리에 실려 오는 갈대들의 꾸짖음 사이로 자꾸만 나의 모습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낀다.
양양 오산리 갈대밭은 자연의 음성을 들려주는 스승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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