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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에서 백두까지… 기고|김포거주 새터민 임ㅇㅇ/미래신문

김포대두 정왕룡 2009. 10. 8. 21:29

산이며 들이며 거리와 마을들에 가을빛이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요즘.

여기 김포지구에 사는 우리 새터민 가족들은 김포보안협력위원회와 민주평통 김포시지회 회원들의 따뜻한 사랑과 마음에 이끌려 오늘 새터민 가족 제주도 문화 탐방의 길을 떠난다.

 

우리가 출발하기로 한 9월23일 아침. 김포경찰서 마당 안은 벌써 감출 수 없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새터민 가족들이 환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8시. 우리는 김포경찰서 강성채 서장님의 대표 인사와 바래움을 받으며 김포경찰서를 떠나 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북에서 태어나 이북식 생활에 푹 절어 살아온 우리 탈북민들에게 있어 ‘공항’과 ‘비행기’라는 말은 좀 낯설고 친숙하지 않지만 우리들만의 유다른 긍지와 자부가 있고 우리들만이 느끼는 남다른 기쁨과 자신감의 만족이 있다.

우리 이북에서 여행가방을 끌고 공항으로 갈 수 있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은 일반인들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아득한 꿈나라의 세계이며 오직 몇 명의 특정한 사람들, 즉 북한 당국의 최고위급 간부들과 외국 경기를 떠나는 몇몇 국가대표팀의 스포츠 선수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이며 보기드문 행운으로 인지되어 있다.

 

그러나 그 행운. 그 특정한 혜택이 오늘 우리 탈북민들에게는 오로지 지금 한국에 와있다는 그 이유하나로 아무 조건없이 너무나도 예사로운 평범한 날들 중의 하루 일상이 되어 비행기를 타고 구름을 헤가르며 꿈을 꾸듯이 하늘을 날아간다.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변모된 현실과 발전의 역사를 한눈에 바라보며 제주도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가슴 설레이게 하는 기쁨과 함께 짜릿이 젖어오는 아픔과 그리움에 뒤섞인 추억들로 또다시 잠자는 나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한다.

 

좋은날, 좋은 일들을 겪을 때마다 매번 겪게 되는 이 두 감정이 대립되는 기류를 느끼는 것이지만 그러나 오늘은 제주도로 간다는 그것으로 해서 더 유다른 것 같다.

이북에 있을 때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배우기 시작해서부터 다 커서 어른이 되는 날까지 입이 다슬토록 외쳤고 부르짖던 말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리고 통일이 되는 날 한라산 꼭대기에 애국기를 꼿고 백록담의 맑은 물에 땀에 흠뻑 젖은 온몸을 씻어본다던 그 전설 같은 제주도의 이야기며, 저녁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제주도 서귀포 마을의 미역을 따고 굴을 캐며 노상 바다의 파도와 짠물에 젖어 산다던 제주도의 억센 해녀들과 철썩 거리는 요란한 파도소리만이 고요한 섬의 정적을 깨우곤 했다고 하던 그 신비경속의 외딴섬 제주도.

 

늘 공상 속에서만 그려왔고 이북의 백성들이 그렇게도 와보고 싶어 하는 곳이며 통일이 되면 한번 가 볼 수 있다는 막연한 바램에 그래서 더 간절한 통일의 상징으로 불리우던 곳이어서 오늘 나의 호기심과 제주도에 부여하는 의미와 기대가 더 큰 것 같다.

짜릿한 추억과 그리움에 빠져 하염없이 창밖의 구름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어느새 벌써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제주도 공항에 도착했다.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을 귀빈 모시듯 바래우는 항공 승무원들의 따뜻한 모습을 뒤에 남기고 비행기에서 내려 우리를 마중나온 안내원(가이드)을 따라 버스에 올랐다.

 

온 버스 안이 떠나갈듯 떠들썩거리는 기쁨 속에서 우리들의 황홀한 여행이 신나게 시작되었다.

최남단 한쪽 끝에 멀리 떨어져 나온 섬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잘 꾸려져있고 21세기를 비약하는 뭍의 사람들과 함께 여기서도 역시 그렇게 벅차게 뛰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확 안겨왔다.

매번 가 닿는 관광지마다 새롭고 이채로운 풍경과 황홀한 정경에 빠져 항상 탐방 대열의 제일 마지막 뒤에서 정신없이 뒤쫒아 따라다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주도 섬마을 생활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제주도 민속촌 관광이었다.

 

‘똥 먹는’ 꺼먹돼지며, 추녀(처마)낮은 자그마한 초막집들, 삿자리를 깔아놓은 좁은 방안, 나무불을 때는 조그마한 부엌 아궁이…

눈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것은 여기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목적으로 일부러 그렇게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남다른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우리 탈북민들에게 있어서는 바로 눈앞에 펼쳐진 이 모습들은 관광이 아닌 실제로, 지금 가난의 현실에 고생하고 있는 이북 고향의 형제 자매들의 처참한 탈진의 모습을 또다시 눈앞에서 실물로 체험하는 것이어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한나라 한민족이 한 영토에 살면서도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분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리는 너무도 판이한 두 현실과 그리고 물질적 풍요와 현대문명이라는 이 유혹에 발목이 잡혀 살면서 복됨과 편리함과 만족한 눈앞의 현실에 기쁘다가도 또 다시 돌아보면 마음 찢는 아픔의 여운 때문에 울면서도 어찌할 수 없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자체가 너무 힘든 아픔이다.

 

정녕 이 땅에 장장 수십년을 갈라져 살아오면서 지금껏 묵묵히 감수하고만 있는 우리 민족에게 그것을 뒤바꿀 그런 기적은 정녕 없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북의 백두산 천지에 올라 ‘우리는 하나다!’,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목터지게 외치던 이 몸이 오늘은 불쑥 꿈꾸듯 한라산에 올라 ‘한라에서 백두까지’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치고 또 외치며 한라에서 백두로 가고, 백두에서 한라로 오게 될 통일의 그날을 조용히 꿈꿔본다.

 

정녕 그날이 그립다. 우리 땅 한지맥의 허리를 동여맨 그 저주로운 끈을 풀어버리고 이 나라에 뻗어간 그 지맥의 골수 골수마다에 건강한 새 생명의 기가 흐르고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앞서가는 새로운 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그날을 목마르게 기다려 본다.

오늘은 비록 이루지 못한 한 많은 바램과 기다림들을 여기 제주도 한라산에 묻고 가지만 언젠가는 꼭 하늘 끝에 닿고 닿은 우리의 소원이 반드시 성취되어 멀지 않은 앞날에 꼭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한라에서 백두로!’라는 끈질긴 그 미련 때문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 걸움을 돌려 우리를 기다리는 김포로 돌아왔다.

 

항상 우리 탈북민들의 제일 가까이에서 곤란을 겪을 때나 어려움을 당할 때 마다 돌봐주고 헤아려주고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귀울여 주시는 우리 김포경찰서 보안협력위원회 위원들과 민주평통 김포시지회 회원들, 그 모든 관심과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기울여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의 인사를 드린다.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어찌할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어지러운 세상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버림받고, 천대받고, 낮선 사람들의 발길에 돌처럼 굴러다니던 우리 탈북민들을 외지에서 고생하다가 자기집으로 돌아온 귀한 자식들이라고 조건 없이 받아주고 품어주고 오직 내 민족이라는 그 이유하나로 같이 울면서 안아주는 그 품, 주저 없이 지친 이 몸을 맡기고 떼를 쓰고 투정질도 할 수 있는 그런 우리집이 생겼다는 것이 놀랍기만 할 뿐이다.

 

고향 이북을 떠나 세상을 떠다니던 그 때나, 거처할 수 있는 내 집과 안정을 찾은 오늘이나 항상 변함없이 이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간절한 바램은 이세상 넓고 넓은 그 모든 땅, 먼 곳까지 내 집처럼 찾아가는 것이건만 가장 가까운 내 옆에 집을 두고서도 갈 수 없는 우리의 땅, 남과 북이 하나로 연결될 그날, 바로 ‘한라에서 백두로, 백두에서 한라로’오고 갈 그날을 간절히 기다려 본다.

이 글은 지난 9월23일 1박2일 코스로 김포서가 마련한 ‘새터민을 위한 한가족 제주도 문화탐방’에 참가한 새터민 임모씨의 소감문으로 김포경찰서를 통해 본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2009년 10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