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학자의 글로벌 리더십]에서도 강조했듯이 현재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두고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과학자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의 생각이 여론을 만들고 여론이 정책을 만든다. 교육제도가 문제라면 국민 여론이 새로운 제도를 원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전 국민이 교육전문가를 자처하지만 교육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수구언론과 지식인의 거짓선동 때문이다. 미국에서 평생 공부하고 교수를 했던 분이 카이스트의 상대평가와 징벌적 장학금제도를 만드니 국민들은 그게 미국식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나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했지만 2004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가서 아이들에게 초중고, 대학교육을 시켜보기 전까지는 우리 교육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몰랐다. 미국에 가서야 우리의 최근 입시제도가 미국 제도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처음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그런대로 작동하는 제도가 왜 한국에 와서는 괴물처럼 변했는지 세미나에도 부지런히 다니며 연구한 결과 우리의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 미국 제도가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만들어진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율성이라는 미명하에 미국 교육제도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회의 균등(equity)이라는 공공성 개념을 빼놓고 겉모습만 도입했기 때문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공교육이 성공한 모든 국가(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등)에는 공공성 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나라는 대부분 중등학교가 평준화되어 어느 학교에 다녀도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나 대학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양질의 대학교육을 받을 경제적 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대학입시에서도 전적으로 성적으로만 학생을 선발하지 않고 지역, 계층, 출신학교를 고려하여 학생의 다양성이 극대화되도록 배려한다. 두 번째 문제는 다양성과 창의성이 생명인 미국의 교육제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획일적으로 운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열린 교육, 특수목적고, 특기 적성교육, 수시입학, 사회봉사 등 수많은 좋은 제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대학입시와 이상하게 결합하면서 입시를 위한, 입시에 의한 교육이 되어버렸다. 다양성과 창의성은 사라지고 입시 괴물로 변해버린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아이들이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문제는 많은 사교육비 부담과 입시지옥의 고통을 안기면서도 품질은 부실하다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우리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는 쉽게 합의를 하지만 그 원인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에 있어서는 시각이 확연히 갈린다. 특히 좌우 이념적 입장이 교육에 대한 생각을 압도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 자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파적 입장보다 더 큰 장애물은 과거 산업화시대의 교육경험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성공신화라고 할 수 있다. 급변하는 세계는 지식정보화 사회에 걸맞은 창의적인 ‘큰 인재’를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산업화시대의 열심히 외워서 시험을 잘 보는 ‘작은 인재상’과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성공신화는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 오래된 벽에 말라붙은 화석화된 신념이다. 그랬기에 어떤 논리를 들이대도 완강히 버텼다. 미국에 가보고 나서야 나 스스로도 과거 산업화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많은 이들의 오해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사람들과 교육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신념의 힘이 무서운 만큼 그것을 깨뜨리는 토론의 힘 또한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한두 번의 토론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자꾸 토론을 하다 보면 우리의 생각에도 조금씩 틈을 만들 수 있고 결국에는 전환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 후보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출간했다. 교육문제의 진짜 해결책은 국민들의 의식과 사고에 있다고 믿었기에 대통령 선거에서 쟁점이 되면 국민학습이 이루어지고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책의 출간을 앞두고 최종원고를 당시 대선후보에게 보내주었는데 입시학원의 스타 강사 출신인 이범 씨가 후보 지지연설에서 이 책과 비슷한 내용의 연설을 해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 원고가 이범 씨에게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담론을 만든 건 이 책이 처음이기에 그렇게 추측한 것이다. 이 책이 대중적으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해오던 오피니언리더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분들이 이 책에 공감하며 찾아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눈 결과 운동에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교사 운동>이라는 단체에서 이 책에 관심을 가져 인터뷰를 했는데 좌우이념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해오던 운동이 옳은 방향이라는 데에 확신을 얻은 것 같다. 송인수, 윤지희 두 분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좌우가 아닌 제3의 길을 택하는 교육시민단체를 해보겠다며 찾아왔다. 결국, 그분들은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우리 사회에 정말로 큰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대선 연설 이후 이범 씨는 교육평론가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강의, 저서 등을 통해 이 책의 핵심내용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지인이 이범 씨 교육특강에 가보니 이 책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강의하더라고 전해줘서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그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워낙 보수, 진보언론 양쪽으로부터 인기가 없다 보니 이 책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책의 내용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학부모에게 알려진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쉬운 점은 이범 씨가 교육에 대한 필자의 생각에 상당 부분 공감하면서도 공개적으로 참여정부 실패론을 외치고 다닌다는 점이다. 교육이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건 참여정부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므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참여정부가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천착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미국 교육엔 있고 우리에겐 없는 것 - 공공성과 다양성
(서프라이즈 / 조기숙 / 2011-04-13)
미국 교육제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한 대안
국민의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교육개혁 하루아침에 안된다
나는 어떤 정부가 들어와도 하루아침에 교육개혁에 성공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한나라당과 조중동, 사교육 시장이라는 우리 사회 엄청난 기득권이 교육개혁을 가로막고 있는데 열화와 같은 국민적 여론이 뒷받침되어도 그 벽을 뚫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참여정부 때에는 국민의 의식마저도 산업화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 의식을 깨기 위해 이 책을 썼던 것이다. 이범 씨의 활동 덕분에 학부모의 의식에 어느 정도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은 큰 소득이다. 하지만 ‘참여정부 교육실패’ 주장은 마치 정부만 잘하면 교육개혁이 될 것 같은 잘못된 기대와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어떤 정부가 들어와도 교육개혁은 지난한 싸움이 될 것임을 국민에게 각인시켜야 겨우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카이스트 문제를 놓고 총장 한 명을 희생양 삼는 분위기에도 반대한다. 물론 총장이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카이스트가 정상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러한 제도에 환호하고 학생들 간에 무한 경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국민이 존재한다. 우리가 산업화 시대에 머물러 있는 국민 의식을 어느 정도 극복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비극적인 교육문제는 또 불거질 것이다. 사실 지금도 카이스트생보다 더 많은 수험생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이 책을 국무위원들에게 돌리며 읽어보라고 권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이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퇴임 후 봉하에서 [진보의 미래]를 집필하기 위해 자주 만날 때 노 대통령은 이 책 이야기를 여러 번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노 대통령의 교육철학을 이 책이 담고 있기도 했지만 통계수치를 제시하면서 논리를 전개한 부분을 매우 좋아했다. 나도 잊고 있던 통계수치를 기억해서 말씀하면서 미국교수들의 진보성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당시 국정홍보처가 발간한 <대한민국교육 40년>이라는 책이 이 책과 동시에 출간되었다. 노 대통령은 두 책이 다 좋아서 어느 책을 추천할지 몰라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다 시기를 놓쳐 내 책을 크게 홍보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리고는 교육에 관한 몇 가지 과제도 내게 남겨주었다. 그것이 결국은 유언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노 대통령의 유업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나는 앞으로 계속 교육에 대한 연구를 그만둘 수 없는 운명이다. 대통령이 계신다면 정말로 즐겁게 연구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너무 크다. 교육에 대한 지속적 연구와 관심을 통해 그분이 내게 남긴 과제를 해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교육개혁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을 하루빨리 앞당기는데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지 않겠는가.
노 대통령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가 꿈꾸는 모델은 진보진영의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북유럽이다. 하지만, 그런 모델은 국민에게 공감을 받기 어렵다. 교육지옥에서 교육천국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생뚱맞게 들리겠는가. 좌파들이 주장하는 대안이 외면받는 이유는 국민에게 현실적인 희망이나 기대를 주지 못하고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입만 열면 외치는 게 미국 교육이고 창의교육이니 진보진영도 그렇게 하자고 맞장구를 치자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 교육이 미국만 따라가도 더 이상 미국으로 탈출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국민은 없지 않겠는가.
미국 이야기를 하면 들어보기도 전에 외면하는 진보진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장기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미국 교육을 대안으로 고려해보자고. 대학진학률, 평등주의 문화, 작은 비율의 재정지출 등 우리의 문화와 조건은 유럽보다는 미국에 더 가깝다. 우리의 사고만 바꾸면 미국교육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면 훨씬 많은 국민의 호응을 받아 교육개혁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참여정부가 제안했던 복지정책안이었던 ‘Vision2030’이 그렇듯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제안도 좌파정치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지 모른다. 노 대통령이 이 책을 좋아했다고 해도 구체적인 대안에 대해서 토론해본 적은 없다. 이 책은 2007년 상황에서 국민들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을 다룬 것이다. 지난 5년간 교육 분야에서 많은 운동과 국민적 학습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2012년에는 좀 더 변화된 환경에 맞는 진화된 대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만 가면 바보가 될까] 재판 서문의 후반부입니다.
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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