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인간사 본향을 향한 향수
-보리피리 시인 한하운 단상모음-
시인 고은은 자신이 시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한하운을 만난 사건에서 찾고 있습니다. 중3시절 길가다가 우연히 주운 한하운 시집을 접한 일이 자신의 영혼에 송두리째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고은 시인과 같이 강렬한 기억은 아니지만 저 역시 중학시절 한하운을 접한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교회에서 선물교환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받은 것이 ‘한국명시 선집’이었습니다. 박목월의 나그네, 조지훈의 승무, 한용운의 님의 침묵 등 국어 교과서에 이미 실려있던 유명시들 사이로 살포시 고개를 내밀며 다가온 시가 ‘보리피리’였습니다. 감수성이 넘쳐 흐르던 중2시절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상경한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며 마음병을 앓던 제게, ‘보리피리’ 곳곳의 시어는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저는 당시 한하운이라는 이름을 대하며 혹시 한용운을 잘못 표기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 사람은 한용운과 형제지간인지 궁금해 하기도 했습니다. 한하운이 나병, 혹은 한센병환자였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성인이 되어 김포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게 된 후 얼마 안된 10여년전. 한하운 시인을 김포에 와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시인의 유택이 시청에서 가까운 공원묘지에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물어 물어 찾아간 길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몇 번이나 근처를 오르고 내리던 중 평범한 비석 하나가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 비석 뒷면에는 보리피리 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하운의 본명이 한태영이라는 사실도 그때 알았습니다. 당시 시인의 유택은 한눈에 봐도 돌보는 사람 없는 초라한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고 절규하며 인간사를 그토록 그리워 하였던 시인의 영혼은 죽어서도 여전히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2015년 10월.
한하운 유택은 새롭게 단장을 마쳤습니다. 지역인사들의 정성과 문인협회의 손길이 더해지면서 묘역주변은 처음 찾았을 때와는 달리 쓸쓸함이 엷어지고 따뜻함이 넘쳐나 보였습니다. 조촐한 추모행사가 진행되던 날, ‘살아서 사람대접을 못받았으니 죽어서라도 왕노릇 해보자고 장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잠드셨나보다’는 어느 참석인사의 발언이 여운을 남깁니다. 유택을 찾는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인께서 왜 하필이면 이곳에 잠드셨나’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나병이라는 천형을 앓은 탓인지 시인의 유족이 수소문 안되고 관련기록도 희귀해 이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여전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운명, 혹은 인연이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시인의 영혼이 김포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해 볼 뿐입니다.
한하운 시인의 고향은 함경도 함주입니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 후 북한에서 숙청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해 월남할 당시 이미 나병이 찾아온 상태였습니다. 한때는 병에서 회복되어 인천 부평에서 복지시설을 경영하며 사회사업도 활발히 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온 뒤 그의 생은 ‘인간사를 그리워하며 눈물의 언덕을 지나는 황톳길 방랑’의 연속이었습니다. ‘보리피리’에는 그의 이러한 심정이 간결한 시어로 잘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이 배어나는 보리피리를 읇조리다 보면 어느새 그것은 한하운의 시가 아닌 우리의 글로 가슴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강건너 북녘땅을 마주하고 있는 김포는 시인의 영혼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언덕길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주민들에게는 분단의 아픔과 고향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센병이라고도 하는 나병은 우리에겐 ‘문둥병’이란 말로 더욱 익숙한 질병입니다.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고 해서 ‘천형(天刑)’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용천배기’라고 해서 보리밭 등에 숨어서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납치하여 간을 빼먹는다는 속설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일제시대에 소록도에서는 아이를 못낳도록 강제 수술까지 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날에야 치료가능한 병으로 분류되었지만 예전에는 사회활동 자체가 금지되는 대상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을 떠난지 오래지만 지금이라도 문둥병 시인의 영혼을 껴안는 것, 그리고 그의 시를 통해 인간사 삶을 반추해보는 것은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적셔주고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심어줄 것입니다. 더불어 이를 바탕으로 우리네 주변의 그늘진 곳에 손을 내밀어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 복원의 희망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보리라는 말은 보릿고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단어입니다. 보리가 이삭을 패는 시기는 우리네 선조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힘겹게 생의 한 고비를 넘기는 나날들이었습니다. 보릿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어 제끼면 그것은 아직 생존에 대한 희망을 꺾지 말라는 자연의 울림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보리밥은 천민에게는 굶주림을 면하는 수단이었지만 부유층에게는 쌀밥과 비교하여 하등취급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보릿고개는 사라지고 보리밥은 웰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보리는 친환경 건강식 곡물로 우리네 밥상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반려견이나 연속극 주인공 이름으로도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하운의 ‘보리피리’는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삶의 애환과 고향의 추억을 연상시켜줍니다. 동시에 친환경 웰빙소재로 친근하게 우리주변에 자리잡은 보리의 복합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자극제가 될 것입니다. 전북 고창에서는 매년 봄 ‘청보리 축제’를 진행하여 지역 브랜드 이미지를 고양시키는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김포에서도 시기에 맞춰 ‘보리피리’ 축제를 진행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마을 안에 시인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는 것처럼 축복받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하운 유택과 관련하여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글학자 장하늘 선생이 남기신 말은 두고 두고 여운을 남깁니다. 장하늘 선생은 한하운 시인의 유택을 가리켜 ‘한 시인의 무덤이 마을 안에 있다는 것은 영광이다. 신의 축복을 받는 영혼이 이웃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시인의 영혼이 눈물의 언덕에 머물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화해와 용서의 언덕을 지나고 분단의 장벽을 넘어 고향을 찾아가도록 우리가 그 길을 닦아주고 여정을 준비해줘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한하운 시인이 김포를 찾아온 이유가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다가옵니다. 김포가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고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곳이 되면 비로소 시인의 영혼은 하늘에서 웃을 것 같습니다. 남녘 소록도에서 황토길 따라 시인의 고향땅 함주에 까지 보리피리 함께불며 오가는 그날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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