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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묘 신미순의총 앞에서 옷깃을 여미다

김포대두 정왕룡 2006. 8. 30. 13:00
무명용사묘 신미순의총 앞에서 옷깃을 여미다
-광성보에서(2)-

 

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손돌목 돈대로 오르는 길에 마주친 수목들은 한결같이 뿌리가 속살을 땅위로 드러내고 있다. 지면아래 편안히 잠들어 있지 못하고 땅위에 칡넝쿨처럼 온몸을 드러낸 채 찬이슬을 맞고 있는 뿌리들의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본 구간에 식재되어 있는 수목은 지형상 뿌리가 지면에 노출된 상태에서 수년간 성장한 수목으로 돌출된 뿌리에 복토시 성장 및 장애가 우려되어......’

수목들 옆에 설치된 안내문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뿌리에 흙을 덮어주면 오히려 성장에 장애가 될 염려가 있어 노출된 모습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게 놔두었단다.

 

눈에 비치는 겉모습만 쫒아가는 세태를 꾸짖기 위함인가.

줄기가지를 떠받치는 힘의 근본을 가르치기 위함인가.

아니면 아직도 가셔지지 않는 민족사의 아픔을 잊지 마라는 경고인가.

 

   
속살까지 드러낸 채 줄기가지와 함께 비바람을 맞고 있는 뿌리들의 형상이 광성보의 한을 담고있는 것 같아 가슴 한켠이 저며온다. 가족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앉아 염하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저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 났을때는 ‘전쟁’이란 단어가 사전에서 사라지길 기도해 본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잊어버리기 위해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황색 자태를 한껏 뽐내는 능소화 무리가 고목위에서 빙긋 웃고 있다.

 

‘쌍충비각’ 앞에 섰다.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형제 및 병사들의 원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비석이 있는 곳이다. 기록으로 보아 어재연은 회령부사, 병마절도사등을 지낸 전형적인 무관이었으나 고향으로 내려와 있던 중 광성보로 급파된 듯하다. 염하를 무단 침입한 미함대에게 조선수비대가 선제공격을 감행한 ‘손돌목 포격전’ 직후 급히 명을 받아 강화도로 오게 되었다 한다. 아마도 수년전 병인양요때 광성진 수비를 맡았던 경험이 고려된 듯 하다. 3백여명의 장졸들을 이끌고 백병전까지 벌이며 분전하다 아우 재순과 함께 장렬히 산화한 그의 영령앞에 옷깃을 여며본다.

   
쌍충비각 맞은 편 아래편에 위치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앞에 섰다.

광성보에서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이다. 전투 후 어재연 형제의 시신은 친지들에 의해 고향에 모셔졌다. 하지만 신원을 알수 없는 51인의 시신을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무덤들 앞에 서서 잠시 묵념을 해본다. 광성보 전투의 총지휘자로서 병조판서로 추증된 예우까지 받은 어재연의 영광된 죽음의 한켠에,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무명용사들의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광성보에서 승리한 미군들이 점령시설을 파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미군들이 물러간 이후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의  신원확인에 어려움을 겪었던 게 틀림없다.  대부분 이들은 호랑이를 사냥하던 포수출신들로 편성되었다 한다. 다른 병사들에 비해 총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기에 차출되었을 테고 용맹성 또한 남달랐으리라.

 

이미 하루전날 초지진 전투에서 미군의 위력을 목격한 병사들의 머릿속에 광성보의 싸움터가 자신들의 무덤이 되리라는 것은 짐작이 되고도 남을 터였다. 떠나온 고향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새웠을 생의 마지막 밤에 이들은 염하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백년도 훌쩍 뛰어넘은 먼 훗날, 한 이름없는 나그네가 자신들의 무덤가에서 쏟아내는 상념의 자락앞에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잊지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이라오.’

신미순의총 무명용사묘를 떠나 발걸음을 옮기는 나그네의 등뒤로, 무덤의 주인공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입력 : 2006년 08월 30일 10:41:47 / 수정 : 2006년 08월 30일 10: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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