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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요, 손돌님!’ - 광성보에서(4)

김포대두 정왕룡 2006. 9. 22. 17:20
‘돌아와요, 손돌님!’
광성보에서(4)

 

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인조5년 후금이 쳐들어왔다. 임금이 서둘러 피난길을 나섰을 때 손돌은 길안내를 맡았다.’

손돌목 돈대를 내려와 용두돈대로 향하는 길목에서 ‘손돌’에 대한 안내문이 길을 멈추게 합니다.

‘손돌목 돈대’가 정상에 위치해 있고 염하의 물길 한가운데로 손돌목이 바라다 보이는 광성보에 ‘손돌공’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옛날 옛적에 인천은’ 이란 타이틀 문구가 맨위에 있는 것을 보니 강화 곳곳의 유적지에 ‘인천’이란 브랜드를 부각시키려는 인천시의 노력이 느껴집니다. 당초 경기도에 속해있던 지역을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김포의 검단과 함께 강화도를 가져가버린 일이 불과 몇 년전임에도, 인천이라는 영역속에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문제는 ‘손돌 설화’에 대한 설명이 김포시의 설명과 시작부터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천시의 설명은 ‘인조 5년’이라는 것과 함께 ‘1627년’ 이라는 서기연대까지 명시해 ‘손돌공 살해(?)’ 사건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인 것처럼 명기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강건너 김포에서는 고려 고종때 몽고 침략시 일어난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려 고종이 송악에서 피난갈 때 배를 댄 지점이 강화도 북단 해안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더 남쪽인 염하의 물길을 지나갔을 가능성은 적어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김포시의 설명은  신빙성이 적어보입니다.

 

하지만 인조가 세자일행을 먼저 출발시키고 뒤따라가려다, 예상보다 일찍 내려 온 후금군사들에게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난갔다는 사실은, 초등학생 정도면 알고있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화도와 조선시대 인조의 연관성을 억지로 부각시키려는 인천시쪽의 설명은 김포시의 설명보다 훨씬 더 궁색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언젠가 읽었던 역사기행 책에서 강화도의 한 향토사학자는 위의 두가지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절충형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역사의 어느시기 대전란 때, 어떤 부자나 벼슬아치의 피난과정에서 일어났음 직한 일이 임금이라는 최고의 권력자까지 확대되어 설화로 채색된 게 아닌가 라는 추측 말입니다. 한가지 사실을 가지고 염하를 마주보고 있는 김포시와 인천시가 색다른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점은 조만간에 상호조정 되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고려때 일인가, 조선때 일인가를 넘어서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손돌 이야기에 담겨있는 ‘민중의 한’일 것입니다.

 

분명 전란이 일어난 원인의 주된 책임은 권력층에게 있음에도 그로인한 일차적 희생은 피지배층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손돌 이야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과정 중  적과 맞서 싸우다 당하는 희생이라면 차라리 영광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난 과정에서도  민중을 끝없이 의심하는 권력자로 인한 희생을 우리는 숱하게 역사속에서 목격해왔습니다. 그간 단단히 다져 온 권력의 기반이 뿌리 채 흔들릴 때가 바로 전란의 과정에서 패배하여 쫓기는 때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따라오는 피난 행렬마저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의심의 대상으로 보면서 항상 감시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속성이 권력층에게 존재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한양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친 선조임금이 김덕령등 여러 의병장을 모진 고문끝에 살해한 사건이나, 한국전쟁당시 수도서울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오른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그런 면에서 닯은 꼴입니다.

 

자신을 따라오거나 호위하는 백성들마저 피난길의 와중에서도 ‘잠재적 적’으로 여기며 총부리를 겨누는 권력자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 다를바가 없나 봅니다.

반면에 죽음의 순간에도 임금의 안위를 염려하며 ‘안전한 뱃길’을 가르쳐주는 손돌공의 이야기는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권력자에 대한 저주를 퍼붓기는커녕 마치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도 한 것 같은 행동 때문입니다. 아마도 구전으로 전해지던 설화가 활자로 정착되면서 ‘忠’의 덕목을 강조하는 지배층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의심을 해봅니다. 덕분에 손돌의 이야기는 애절함과 안타까움을 더해주지만 본래 가지고 있었음직한 당당한 민중성이 상실되어 버린 채 ‘한’의 이미지만 남지 않았나 추측을 해봅니다.

 

염하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손돌의 넋을 생각하며 길을 걷는데 한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칩니다.  손돌추위로 일컬어지는 바람이 분다는 음력 10월 20일은 아니지만 염하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손돌의 한숨인양 마음 한 구석을 아리도록 파고 듭니다.

 

‘돌아와요. 손돌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의 이미지만 가득 담겨있는 손돌공의 모습에서, 국난극복의 주역으로 나섰던 당차고 강건한 민중성의 회복을 기대하며 염하를 향해 외쳐봅니다.

   

 

입력 : 2006년 09월 22일 12:54:26 / 수정 : 2006년 09월 22일 12: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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