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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 든 물마을의 봄노래

김포대두 정왕룡 2006. 3. 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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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 든 물마을의 봄노래 


요즘이야 사용되지 않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자주 사용하던 ‘춘궁기(春窮期)’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가을에 거둔 식량을 겨우내 먹고 나면 봄이 되는데, 봄에는 먹을 것이 떨어져 곤궁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시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해 봄이 지나 여름이 올 무렵에야 보리가 식량으로 등장하는데, 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그 고달픈 때를 맥령(麥嶺), 즉 ‘보릿고개’라고 다산이 사용했던 단어였습니다.

오늘이 경칩(驚蟄)이니 봄이 완연해진 계절입니다. 봄바람인 동풍(東風)이 불어오고 대지에는 새싹이 돋으려는 징조가 보이며, ‘봄마음은 나무 끝이 푸르다(春心木末靑)’라는 시구처럼 봄의 낌새가 확연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풍년이 들기보다는 흉년만 자주 들던 그 옛날, 가난한 하늘 아래 봄은 왔지만 백성들의 가난은 막을 길이 없던 때인데, 그때 다산이 읊었던 시를 읽어보면 가난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고 처절함과 삶의 아픔이 녹아 있어 우리를 감동시켜 줍니다.

                          남한강 흐르는 물에 고기 낚는 어선들은
                 해마다 보리 자라는 계절에 시세가 있네.
                 가련쿠나 백사장가 그물 말리는 곳에는
                 석양에 백구만이 졸고 있구려.
                 黃驍流水釣魚船 時勢年年養麥天
                 沙上可憐晞綱處 夕陽唯有白鷗眠 <荒年水村春詞十首>

처절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는 시입니다. 춘천 쪽에서 한강으로 합해지는 북한강인 녹효수(綠驍水)와 충주 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인 황효수(黃驍水)가 합해지는 양수리가 다산의 고향인 마재마을이었습니다. 보리가 자라는 춘궁기여서 물고기라도 잡아먹으려고 그 무렵이면 낚싯배가 한창 시세(時勢)가 있다니 슬프고도 아름답습니다. 고기 잡는 그물을 말리는 백사장의 모습이 을씨년스러운데, 석양빛에 백구만 졸고 있다니 강마을 풍경을 더 이상 곱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 속에 피어나는 다산의 시심은 그래서 처절하고 아름답습니다. 10수 모두가 정말로 고운 시들이지만 우선 한수만 읊어보았습니다. 이는 다산 노년기이던 72세 때의 시인데, 그 연령에 그만한 시혼이 있었던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