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왕국’
얼마전 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발해는 그런 존재였다. 중국과 당당히 맞선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를 떠올리며 뛰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으면서도 발해란 나라는 그저 아스라이 안개너머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나라였다. 중국에서 자신들의 지방국가 중 하나로 규정하고 일본과 러시아 학자들이 다민족 혼성국가로 이야기할 때 우리의 목소리는 고구려 계승국가라는 가냘픈 목소리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열풍이 불면서 그 바람이 발해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일대기를 드라마화한 사극에 의해서다. 고구려 말기 부분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역사적 고증에 논란이 되는 면이 적지않은 드라마라는 한계가 있긴하다. 또한 대조영이라는 인물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발해’의 정체성을 찾기가 좀처럼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부활’을 내걸고 만주벌판을 내달렸던 발해인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측면은 무시할 수 없다.
미시령을 내려갈 때 만 해도 드라마 ‘대조영’의 세트장이 근처에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길가 곳곳에 달려있는 휘장과 안내판이 사람의 시선을 외면하지 못하게 한다. 인근숙소에 간단히 짐을 풀고 세트장을 향했다. 입구에 광개토왕비가 우뚝 서있다. 만주에 있는 실물과 똑같은 크기라 한다. 비록 드라마 세트장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속초에 와서 고구려와 발해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제법 규모가 커보인다. 입장료 6천원이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근처에 있는 리조트사에서 드라마 종영이후에도 대규모 역사테마파크로 운영해나갈 목적으로 전액 조성비를 제공했다 한다.
한때는 전국 지자체에서 너도나도 앞다투어 드라마 세트장 유치경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치에 성공한 지역은 해당 드라마의 시청률이 올라가면 덩달아 유명세를 누리면서 그 혜택을 단단히 봤다.
하지만 해당 드라마가 종영된 이후 세인의 기억속에 잊혀지면서 이제는 세트장이 애물단지도 모자라 흉물처럼 되어 가고 있다. 그 유지비를 감당하기에도 벅찰 정도라 한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부담을 무릅쓰고 야심차게 역사드라마 세트장 조성및 운영에 뛰어든 업체의 도전정신이 어떻게 성과를 거둘지 두고 볼 일이다.
‘드라마 촬영을 위한 대규모 세트장, 그 자체 정도의 분위기’
세트장을 둘러 본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랬다. 애시당초부터 고구려 민속촌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여 애를 쓴 흔적도 느껴졌다. 하지만 찾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허전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이곳을 조성한 사람들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우리 역사학계의 고구려, 발해에 대한 연구수준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니 우리 사회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의 산물을 여실히 보여준 예가 아닐까? 조선시대의 사극을 촬영해도 하등 어색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세트장 분위기에서 고구려, 발해인들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드라마 종영후에도 지속적인 볼거리를 만들어 운영수익을 창출하겠다던 업체의 설명이 웬지 불안하게 느껴진다.
“대조영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한다요?”
단체관광을 온 듯한 어르신 일행중에 한 할머님께서 나에게 ‘대조영’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신다. 오늘은 촬영이 없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텔런트들이 눈에 안띤다. 기대하는 답을 못얻은 할머님 일행은 실망한 표정들이 역력하다. 여기저기 걸려있는 사진장면들이나 방송녹화 영상물로는 이곳을 찾는 분들의 기대감을 충족 못시키는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가 아니라 역사 한가운데서 대조영의 윤곽이 뚜렷하게 잡힐 날이 언제일까?’
여전히 고구려와 발해는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하루빨리 남북 공동의 힘으로 고구려는 물론이요 발해의 실체를 명료하게 잡아내는 날이 와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발해는 여전히 우리에겐 안개너머의 잊혀진 왕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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