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령 고갯길로 갈까? 터널길로 갈까?’
김포를 출발한지 3시간 정도 지났을까? 미시령 팻말이 보이면서 갈등이 생긴다.
고속도로를 안타고 국도로 왔다고 툴툴거리는 딸아이와 아이엄마에게 맞서서 그래도 여행은 국도를 달리는 게 제맛 이라고 외쳐오며 고집스레 달려온 여정이다.
도착지점인 속초를 눈앞에 두고 잠시 고민이 생긴다. 아이에겐 여행을 할 때 큰 즐거움중의 하나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는 것이다. 오는 길에 국도변 휴게소에 들르긴 했지만 오뎅꼬치등 이것저것 입에 당기는 것을 먹는 즐거움이 고속도로 휴게소 같진 않은지 아직 성에 안차는 눈치다.
그래도 고속도로에 비해 사람사는 풍경을 시야에 담을 수 있는 국도변이 낫다고 판단되어 그냥 대달렸는데 설악산 문턱에 접어든 지금, 예전에 못했던 고민이 다가온 것이다. 미시령 터널이 개통되어 영동과 영서가 한순간에 손잡게 된 덕분에 여행객에겐 시간이 훨씬 단축 되었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속초와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과거의 유물로 전락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순간만은 아이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빠, 고갯길로 가자.”
뜻밖의 결정에 아이의 얼굴을 뒤돌아봤다. 뭐 잘못된 게 있냐는 표정이다. 도착시간이 얼마남았냐며 보채던 모습과 연결이 잘 안된다. 어쨌든 오랜만에 아빠와 이심전심이 됐다. 운전하느라 힘들었던 아빠를 위한 배려인 듯 하다. 미시령 고갯길은 설악산과 숨바꼭질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겨울에 폭설이 내릴라치면 대관령과 더불어 고갯길이 통제되는 1호대상이었다. 하지만 대관령이나 미시령이나 터널의 개통으로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교통물류의 측면에서 보자면 더할나위 없지만 여행객의 입장에선 아쉬움이 스쳐가는 것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대관령길과 다르게 고갯마루를 오를 수 있는 선택권을 남겨준 미시령이 고맙기만 하다. 이게 국도와 고속도로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미시령 고갯마루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터널이라는 빠른 길을 선택했다면 맛보지 못할 운치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연의 모습에 자신을 일치시켜 잠시나마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차량이 생기기 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오르고 오르다 이 곳 고갯마루에서 땀을 훔치며 동해를 내려다 봤으리라. 인제 쪽에서 오른 사람들은 내려가야 할 동해안을 바라보며 곧 마주치게 될 푸른물결에 발을 담그는 상상의 나래를 창공에 실어 보냈으리라. 속초쪽에서 오른 사람들 역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며 그 시선이 머무는 끝지점, 동해의 물결과 기약없는 작별인사를 했으리라.
페인트 자국이 덕지덕지 떨어져 있는 휴게소 입간판 앞에 섰다. 거의 흉물화 되다시피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마치 폐허가 된 마을앞에서 그래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장승을 연상시킨다. 장승이야 민속적 가치로 오래될수록 사람의 정감을 끌지만 방치된 철제입간판은 흉물 그 자체다. 사람의 손길이 닿을수록 망가지는 자연과 달리, 사람과 멀어지며 갈수록 무너져가는 철제 인공 구조물이 안쓰럽다. 가까이 다가가 쓰다듬어보지만 촉감이 싸늘하다.
“아빠, 여기야. 빨리 찍어.”
아빠의 시선이 한참이나 머무는 게 뭔가 다르다 생각했는지 딸아이가 철제입간판 밑에 나가가 포즈를 취한다. 많이 자랐다지만 아직은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아이의 모습과 철제입간판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미시령 고갯길의 쓸쓸한 심정이 담겨진 것일까? 가곡 장안사의 끝구절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래도 사람과 차량의 발길에 지쳐있던 이곳이 이제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게 된 일이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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