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만 오면 생각나는 인물들이다. 왜 이들은 철원에다 자신들의 근거지를 만들었을까?
비무장지대 안쪽에 위치한 궁예도성은 접근이 제한되어 있어 상상속으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한탄강이 휘감아도는 한복판의 고석정은 쉽게 다가갈 수 있어 임꺽정의 숨결이 한결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임꺽정은 석성을 쌓고 관군과 대항하였다 한다. 고석정 광장에 위치한 임꺽정의 동상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단골로 기념촬영 하는 곳이다. 웃통을 벗어제친 근육질의 단단한 몸에 등 뒤로 큰칼을 찼다. 양손으로 벽을 부수며 세상 밖으로 차고 나가는 역동적 자세다. 아이들이 동상앞에 함께 모여서 사진을 찍는다. 저마다 손으로 V자 형상을 그려 보인다.
5백년 전만해도 임꺽정은 사회적 기피인물이었다. 그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 당시 카메라가 있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면 그 속에 들어있던 인물들은 틀림없이 큰 벌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너도나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형상 앞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할 정도로 그는 친근한 대상이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향해 신분차별 타파를 온몸으로 울부짖는 백정출신의 도적이 아니라 로봇 태권브이 같은 친근한 정의의 사자다. 오늘과 같은 평등사회를 만드는 데 임꺽정과 같은 수많은 선인들의 희생이 바탕에 깔려있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알고 있을지 궁금하다.
물은 아이들에게 항상 생기를 안겨주는 존재인가보다. 고석정 아래 한탄강 백사장에 내려서기 무섭게 저마다 물놀이에 정신없다. 별다른 프로그램이 필요없다. 소리지르고 내던지고 끼얹고 물장구치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동시간이 되어 ‘집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각자 얼굴표정에 아쉬움이 잔뜩 배어나온다. 하지만 어쩌랴. 야외 현장학습의 으뜸목표 중 하나가 규율과 질서, 그리고 협동의식의 함양에 있음을.
비무장지대 땅굴을 따로 견학 간 저학년 팀들이 합류하였다. 점심식사 후 레프팅 장소로 이동하였다. 아이들이 가장 기다려 온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다. 출발에 앞서 조별로 각각 그룹을 나누었다. 각 조를 책임진 조교들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군기확립 차원의 몸짓인 것 같다. 레프팅에 참여하려 함께 따라 온 엄마들의 표정에 긴장감과 설레임이 묻어있다. 아이들의 안전을 살피면서도 학창시절 수학여행 갈 때의 표정처럼 흥분이 배어있다. 인솔 총책임자이신 교감 선생님도 레프팅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신발끈을 조여 매신다.
하지만 시작부터가 순조롭지 않다.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바위에 배가 걸려버렸다. 젊은 조교의 익숙한 지도솜씨로 위기를 잘 넘겼다. 오늘따라 역풍이 강하게 분다. 바다와 다르게 강에서 레프팅 하는데 바람방향이 뭐 그리 중요하랴 싶었는데 영 그게 아니다. 함께 배에 탄 대원들을 보니 대부분이 여학생들이고 3학년 꼬마 남자아이가 한명 있다. 결국 고비가 닥쳐올 때마다 해결책임 몫을 조교와 나눠 질 수 밖에 없다. 젊은 조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구령지시가 있을 때마다 앞장 서 소리를 지르다보니 어느새 목이 쉬어버렸다.
“저는 열심히 저었단 말이에요. 얘가 노젓는 시늉만 해요.”
“자신이 요령피우면 다른 친구들이 더 힘들 수 밖에 없어. 이 보우트에는 그런 얌체족은 없을 줄 안다” 짐짓 노젓는 시늉만 한다고 한 아이를 조교가 지적하니 그 학생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다른 친구를 가리킨다. 그 와중에서도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협동정신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조교의 모습이 믿음직하다.
어언 한시간을 흘러왔을까?
너무 험하다 싶은 곳에선 내려서 걷고, 유속이 느린 곳에선 단체로 물에 빠져보기도 하고, 다른 배와 부딪힐 때는 노를 이용하여 물싸움도 해보며 한탄강의 기암절벽 사이를 지나오는 데 종착지점인 승일교가 보인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절반씩 건설하였다 하여 붙인 이름이 ‘승일교’라 한다. 힘들 때는 ‘도착시간’을 묻던 아이들이 막상 승일교에 이르고 나니 아쉽다는 표정들이다. 보우트에서 내리는 아이들 중 물에 안젖은 친구가 없다. 여기저기서 한기를 못이겨 이빨 부딪히는 소리도 들린다.
그래도 각자 얼굴엔 ‘해냈다’는 뿌듯함이 배어나온다. 도착지점에 먼저 와있던 지도 선생님들이 반갑게 아이들을 맞이해준다. 견우와 직녀가 따로없다. 한시간 가량의 헤어짐이었는데 ‘만남’이란 두 글자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나보다.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 앞에서 무용담을 늘어놓을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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