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장, 그 아픔의 현장에서
‘이 건물은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사형을 집행한 곳이다.’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입구의 안내판 글은 ‘사형’이라는 글자만으로도 싸늘함을 안겨줍니다.
일제의 침략과 만행에 항거하다 투옥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순국선열들의 넋이 서려있는 사형장은 1988년에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사형장의 둘레는 5미터 높이의 붉은 벽돌담이 쌓여있고, 건물면적은 50평방 미터이며 내부에는 사형을 집행할 때 사용한 사형수 의자, 동아줄, 배석자용 의자가 있습니다.
사형장 입구에는 ‘통곡의 미루나무’라 불리는 고목이 하늘을 향해 서있습니다. 사형장 입구의 삼거리에 하늘높이 자라고 있는 미루나무는 처형장으로 들어가는 사형수들이 붙들고 잠시 통곡했다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사형장 안에 있는 또 한그루의 미루나무는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정말 그들은 이 미루나무 앞에서 통곡하였을까?’
‘통곡의 미루나무’ 옆에 서있는 안내문을 읽어 내려가며 떠오른 의문입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사형 집행장으로 들어가기 전, 사형수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그들이 독립운동을 한 정치사상범이라면 오히려 의연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통곡을 한건 사형수들이 아니라 이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과 저 미루나무가 아니었을까? 떠나가는 사람보다도 슬픔과 한을 안고 남은 생애를 대신 살아가야 하는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부채의식은 세월이 아무리 흐르더라도 지워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다른 곳과 달리 사형 집행장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한 몇몇 간단한 도구가 놓여있고 배석자가 앉아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좌석들이 있을 뿐입니다.
반대편으로 문을 빠져나오니 ‘시구문’이 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어 목숨이 끊어진 시신을 지하에서 들어내어 바깥으로 빼내는 출구입니다. 분명 입구로 들어올 때는 생명이 붙어있던 사람들이 그 비좁은 공간을 빠져나오면서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실려 나가는 장면을 떠올리니 온 몸 에 싸늘한 기운이 퍼집니다.
‘그래도 이 분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후손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까?’ 아직도 해외 곳곳의 벌판에 유골이 파묻힌 채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무명 인사들이 얼마나 많던가. 사형 집행장 근처에 이곳에서 목숨을 다했거나 옥중생활 중 얻은 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 석판을 보면서 스쳐간 생각입니다.
‘그들이 목숨까지 버려가며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조국? 독립? 자유? 해방?’
사형장을 떠나오며 온갖가지 질문이 끊임없이 솟구쳐 오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뛰어넘는 그 무엇을 탐구해보려 여기저기 시선을 던져보지만 마음만 답답할 뿐 생각이 확장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을 말하라 한다면 친일청산 실패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친일파 청산은 커녕 해방이후 오늘날 까지 사회 곳곳에서 그들이 기득권을 형성하고 국가권력까지 주물럭 거리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독립유공자들이 푸대접을 받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2세들에게까지 가난을 대물림했던 나라도 없다는 현실이 서글픔을 안겨줍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독립역사관으로 개칭한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갔다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습니다.
역사는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입니다. 현재의 삶에 교훈을 남기지 않는 역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단장한 서대문 형무소의 모습은 현대사의 아픈 흔적을 자꾸 과거의 유물로 단정 지으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형무소의 담장높이 만큼이나 높이 쳐져있는 일제시대와 21세기의 간격은 여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존재인가봅니다.
해방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자행되었던 폭압의 현장이 바로 이곳인데 애써 그 흔적을 외면하고 일제의 만행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해방 후 독립 인사들이 어떻게 탄압받고 친일파들이 득세하게 되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독립투사들이 추구했던 가치도 추상적이고 모호한 설명에 둘러쌓여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역사의 한 고비를 이제야 넘어서나 했는데 그보다 더 높은 고비가 나타나는 지금, 서대문 형무소란 이름 뒤에 ‘역사관’이라는 호칭을 붙이기가 겁이납니다. 나에게는 여전히 거기에 있는 건물이 역사관이 아닌 서대문 형무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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