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나눔글

유관순 소녀를 생각합니다-서대문 형무소에서(1)

김포대두 정왕룡 2008. 1. 15. 05:38

   
   
 

유관순 소녀를 생각합니다

 

‘이곳은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순국하신 수많은 애국선열의 얼과 혼이 깃든 독립의 현장이며 살아있는 역사의 터전입니다.’

 

늦가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주변공원의 단풍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서대문 구청장 명의의 안내판도 검붉은 가을단풍의 아름다움에 가려 언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학생단체 행사에 여러번 함께 따라나섰지만 오늘 서대문 형무소 발걸음은 웬지 가볍지가 않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라는 명칭이 가져다 주는 무거움이 가슴 한켠을 짓누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이 원시상태를 벗어나 문명의 단계에 들어서면서 국가체체를 형성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중의 하나가 아마도 감옥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계급사회와 권력의 등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체계 형성을 수반하는 일을 불러왔을 것이고 그중에서도 형벌에 관한 법률 제정이 가장 으뜸이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감옥의 등장은 범법자의 자유를 구속함으로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표방하였겠지만 실제 현실은 이런 취지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범죄의 이면에는 사회계급적 모순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서대문 형무소를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한 일제의 만행장소’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어쩌면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족’이라는 두 글자를 뛰어넘어 ‘인권’이라는 인간본질의 개념까지 영역을 확장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안내팻말이 일제시대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채 해방이후 혼란기, 귄위주의 정권하의 ‘인권말살’의 생생함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입구에 들어서는 발걸음을 웬지 떨떠름하게 합니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중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제일먼저 눈에  띠는 이름은 ‘유관순’이었습니다. 어린시절 국민학교 음악교과서에서 풍금소리에 맞추어 따라 부르던 노랫말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일제가 여성전용 옥사로 만들었다는 지하감옥은 채 한 평도 안되어 허리를 똑바로 펼 수도 없는 음산한 곳이었습니다. 1920년 유관순이 일제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해 ‘유관순 굴’로 불리기도 한다는 설명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곳에 갇혀 있으면서 죽음을 앞두고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삶을 내던지고 모진 고문도 감수하면서 일제와 맞서게 하였을까? 그녀도 사랑한 남성이 있었을까? 그녀는 지하감옥 창살로 비쳐지는 단풍을 보면서 책갈피에 끼어넣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애국열사 유관순의 모습에 가려져 사라져버린 ‘청순한 10대 소녀 유관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식민지 치하에서 10대 소녀를 독립만세운동 일선으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마음에 밀려들었습니다. 충청도 시골에서 여자의 몸으로 서울로 유학 올 때는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배움’이라는 개인적 꿈을 일구어 나가기에는 시대의 그늘은 그녀가 생을 마감하였던 지하감옥의 어둠만큼이나 너무도 깊었을 것입니다.

 

제국주의 세력이건 권위주의 국가권력이건 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자들에 맞서는 투쟁의 숭고함은 가을날의 단풍빛깔보다 더욱 진하기에 ‘유관순 지하굴’을 내려다 보는 마음이 숙연함에 젖어듭니다. 그녀가 창밖으로 비쳐지는 햇살을 보면서 삶의 이별을 고할 때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90여년의 세월이 지난 먼 훗날, 가을날 감상에 젖은 한 후인이 그녀의 생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행동이, 한가닥 위로가 되길 빌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