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엘파소 별 (simc) / 2009-12-19 12:09)
(서프라이즈 / 엘파소 별 / 2009-12-19)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롬 7:15, 19, 21-22) 인간이 지닌 이 양면성은 인간의 끝없는 문제이며 우리 세계가 겪는 모든 고통의 뿌리와 닿아있다. 오늘 인류가 한 편에서는 선을 행하며 창조적, 생명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파괴하고 상처를 입히는 반생명적인 일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마치 우리가 타는 자동차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지만 동시에 공기를 오염시키며 우리의 행복을 갉아먹는 보이지 않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숨겨진 내면과 종교의 거룩함으로 위장한 위선적 악마성을 고발하는 저작들을 통해 인문학적 숨결을 거침없이 토해내는 ‘르네 지라르’가 최근 저작 ‘클라우제비츠를 완성하다’ (René Girard, Achever Clausewitz, Carnets Nord, 2007)에서 인간의 모방적 욕망과 경쟁이 나쁜 상호성을 통해서 치달을 수 있는 인류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은 인간이 지닌 문제에 대한 성실한 인문학적 통찰로 보인다. 앞서 바울이 고백하였듯이 인간이 하나님을 모방 대상으로 삼지 않고 죄의 본성을 닮아가는 속성을 죄로 판단한 것처럼 인간이 상호관계 속에서 악한 것을 경쟁적으로 모방하며 자기파괴적인 길로 치닫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한 것은 오늘 인문학의 위기에 봉착한 부도덕한 시대에 인간 자신을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통찰이 분명하며, 기독교인들이 성서적 관점에서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이해하는 기독교적 성찰과 대화할 수 있는 깊은 혜안이 분명하다. 인간이 모방적 존재라는 것은 최근 신경화학적 발견인 ‘거울 뉴런’ 이론으로 증명되는 일이지만 이미 성서 창세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보다는 악마와 사탄의 교활한 꼬임에 쉽게 넘어가 경쟁적으로 악행의 대열로 달려간다는 점이다. 성서는 이 점을 끝없이 경고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 두 얼굴을 지닌 채 바울의 고백처럼 비참함을 겪어야 하는 원인이 아닐까 싶다. 우리 인간에게는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의 전염성이 훨씬 강하다. 바르게 되는 것보다 비뚤어지기가 훨씬 쉽다. 반듯하게 세우는 일보다 허물어뜨리고 부수는 일이 쉽고 빠르다. 악한 것을 닮아가는 일은 선한 것을 배우기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이루어진다. 알코올과 담배로 찌든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란 아들이 이후 알코올 중독과 담배 중독에 빠질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은 것은 이제 상식이다. 이렇듯이 인간이 죄와 악에 대해 지닌 취약성은 딱히 성서의 증언을 들지 않아도 분명하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성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 경쟁이라는 또 다른 은밀한 파괴적 모방이다. 은밀한 경쟁심, 이것이 인간의 이중성을 강화하는 원인이 된다.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이 경쟁적이며 파괴적 모방이 인간을 도덕적 타락으로 내몰고 사회를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욕망의 전차로 만들어가면서도 근엄한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중적이고 기막힌 위선으로 나타난다. 종교적 성찰이나 인문학적 반성들은 찾기가 어렵고 오직 경쟁심이라는 동력으로 마구 달려간다. 예를 들어보자 이명박 대통령이 온갖 탈법과 불법을 행하고 전과가 14범이니 하는 부도덕의 백화점이라는 조롱을 받지만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도리어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훈계한다. 독재자들의 특징이다. 그가 임명한 모든 장관들도 그에 못지않은 탈법과 불법을 일삼았으며 최근 총리가 된 사람도 자신의 탈법과 불법에 대해 아무 거리낌을 갖지 않는다. 그러면서 믿어주지 않는 국민을 나무란다. 순식간에 한 나라의 정부가 마치 무슨 범죄조직처럼 되고 말았다. 그들은 국민 앞에서 상전처럼 훈계하며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삥땅을 뜯는 조폭처럼 행세한다. 이러한 고위 공직자들의 이중성은 모든 사람들에게로 한순간에 전이되고 만다. 나쁜 것을 모방하는 것은 아주 빠르고, 쉽다. 방송도 언론도 그 어디에서도 이러한 타락의 행진을 멈추자고 말하지 못한다. 언론의 거룩한 사명을 들먹이며 앞다투어 경쟁적으로 타락의 행진에 합류할 뿐이다. 인문학적, 종교적 지성인들도 감히 이 물결을 멈추라고 명령하지 못한다. 타락의 물결이 불어나는 것은 한순간이며 아주 강력하다. 학자 정운찬의 이중성이 보여주는 바가 정확히 한국사회의 이중성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순식간에 퍼져간다. 파괴적 모방의 속도는 창조적 모방에 비하여 빛의 속도에 가깝다. 한국의 아파트 값이 어떻게 오르는가? 서로 경쟁적이다. 저쪽 단지가 얼마면 우리도 얼마로 올리자고 아파트 ‘부녀회’가 작전에 들어가지 않던가? 양말장사가 잘된다고 하면 가방 장사도 구두 장사도 양말장사에 뛰어들지 않던가? 중소기업이 무엇으로 성공하면 대기업이 또 경쟁으로 뛰어들어 마치 이판사판으로 경쟁하지 않던가? 오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망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경쟁하여 이기기 위해 탈법과 불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이 마치 일상처럼 되어버린 한국사회를 지켜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도덕은 없고 경쟁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사회는 인간의 타락을 가속화 한다. 한국의 교육상황은 가장 지독한 경쟁 현장이다. 지독한 경쟁은 당연히 파괴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모두 일류 대학이 목표다. 배우고 성찰하는 학문이 목표가 아니다. 오직 경쟁이다. 누구네 집 아이보다 더 나아야 하고 누구네가 어디를 갔으니 우리 아이도 그래야 한다는 형식이다. 교육이념이나 가치에 대한 논의는 단지 장식품일 뿐이다. 온통 경쟁심과 허영심, 시기와 질투, 소유하려는 욕망이 비빔밥처럼 엉긴 감정의 덩어리가 골목마다 굴러다닌다. 경쟁심과 허영심, 시기와 질투, 소유하려는 욕망이 뒤엉킨 인격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이중성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극복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는 인간의 내적 성찰력 보다는 욕망에 따른 모방을 선택한다. 뉴욕의 월가에서 터진 인간의 물질적 욕망과 허영심의 폭력적 파괴력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몰고 왔는지를 우리는 지금 겪어오고 있다. 이 욕망의 폭탄이 9·11 테러 이상의 비극이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물질적 부유라는 가면을 쓰고 인간의 문명을 파괴하는 이 어리석은 테러 현상을 막을 길이 없다. 이중적인 위선적인 사회 시스템을 성찰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두 사람을 기억한다. 한 사람은 부자이면서 젊고 고위 공직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적으로도 다른 이와 경쟁에서 뒤처질 일 없는 모든 이들의 선망이었다. 그가 영생과 관련한 질문을 예수께 했을 때 소유를 팔아 이웃과 나누라고 대답했고 그 사람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다른 한 사람은 삭개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무역의 관문인 여리고에서 세관장을 맡고 있었으며 돈을 뜯으며 세도를 부린 탓으로 주민들로부터는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가 예수와 만나 만찬을 나누게 되었을 때 마음에 감동을 받아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 절반을 가난한 이웃과 나눌 것이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게 뺏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예수는 그가 구원에 이르렀다고 선언한다. 모든 사람들이 달려가는 욕망의 길을 포기하는 결단을 요구했을 때 한 사람은 외면했고 한 사람은 결단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살기로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악마가 유혹하는 욕망을 따라가는 두 얼굴이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형상,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기 원하나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가 깨우치자 했던 인간의 이중성과 위선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적 지식은 많으나 정작 실천하고 포기하는 일에서는 주저하며 경쟁의 물결을 따라 이기적 욕망과 악마의 파괴적 유혹을 닮아가는 이중적 얼굴들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적 성찰과 종교적 성찰이 무감각해진 이 시대에 인문학과 성서를 배우고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cL) 엘파소 별
인간의 두 얼굴
욕망의 모방과 창조적 포기의 결단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 선한 면이 있는가 하면 악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창조적이기도 하지만 한편 폭력적이며 파괴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 신앙적 영웅인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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