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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속으로! -대화(1)-

김포대두 정왕룡 2010. 8. 4. 00:13

누리야. 안녕?
꽤 오랜만에 누리에게 편지를 써보네.
어릴 적엔 누리에게 참 편지를 많이 썼는데 언젠가부터 아빠가 바쁘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더니 이제는 대화가 단절될지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주는 단계에 이르렀구나.

다행히도(?) 아빠가 지난 선거에 실패하면서 비교적 한가해지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많아 그간 소홀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구나.

 

누리도 벌써 중학교 2학년.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는 시기에 그간 단절되었던 편지대화를 다시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단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네루가 딸에게 썼던 옥중 역사서신의 깊이는 아니더라도, 암울했던 독재시절 백기완 선생이 딸과 나누었던 편지대화의 격정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누리의 소중한 시기에 아빠와 나눈 대화를 돌이켜보며 먼 훗날 따뜻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나름 의미는 있겠지?

 

누리와 첫 대화는 영화 이야기로 풀어야겠구나.

 

“그거 반공영화 아냐?”
누리가 ‘포화 속으로’라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던 질문이지? ‘포화 속으로’ 라는 영화가 누리 또래 친구들에게 개봉 전부터 ‘탑’이라는 아이돌 스타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아빠, 반공영화라는 게 뭔데?”
“응, ‘공산주의는 악한 것’이라는 주제를 미리 정해놓고 스토리를 거기에 꿰어 맞춰 이끌어가는 영화들이야. 아빠가 어렸을 때 엄청 많이 봐왔던 것들이지.”

그리고 누리가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온 다음에 첫마디는 이거였지?
“아빠도 영화를 본 다음에 나와 토론을 해보자. 아빠가 생각했던 것처럼 반공영화는 아냐. 친구 진아는 눈물까지 흘렸는 걸? 북한장교는 아들사진을 간직하고 다니고 주인공은 북한을 짐승으로 묘사한 포스터를 찢어버리던 걸?”

 

음. 누리야…….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반공이라는 것, 6.25 전쟁이라는 것이 건드리기에 민감한 사안이란다. 북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간적으로 묘사하면 색안경을 끼고 사상을 의심받는 풍조가 여전히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

6.25 발발 60주년인 올해에 맞춰 개봉된 ‘포화 속으로’ 라는 영화는 이런 점에서 아빠에게는 ‘학도병’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어떻게 묘사했을지 조심스럽게 다가설 수밖에 없었단다. 다만 누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전쟁의 포화 속에 피어난 따뜻한 인간애의 표현이라는 말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영화관에 들어서게 되었지.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난 뒤 아빠의 마음은 허전했단다.
‘스토리와 상황 설정의 허술함, 그리고 여전히 반공의 틀을 탈피하지 못한 영화’
아빠가 ‘포화 속으로’를 보고 난 뒤의 느낌이었단다. 더구나 극 중반이후부터는 졸리기까지 했다면 믿겠니?

똑같은 영화를 보고난 뒤 누리와 아빠가 가졌던 느낌의 차이에 대해 굳이 어떤 게 옳다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구나. 하지만 누리가 크게 되면 이때를 회상하면서 왜 아빠가 이 영화를 보면서 씁쓸해 했는지 한번쯤은 진지하게 이해의 폭을 넓히길 기대해본다.

 

소나무만 보면 숲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단다. 영화에 부분적으로 보이는 인간적 요소가 그 소나무에 해당되는 거지. 그럼 숲은 뭐냐고? 비록 예쁘게 포장하려 애썼지만 아빠의 눈에는 ‘반공, 냉전’이라는 숲으로 관객을 유도하려는 연출의도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단다.

 

“아빠. 요즘 TV에 전쟁 드라마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왜 그런 거지?”
누리가 언젠가 물었던 질문이지? 한국전쟁 60주년이라는 시기적 특징 때문이라고 단순히 말하고 싶지는 않더구나. 그러기엔 무언가 복잡 미묘한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한마디로 말할 수 없어서 아빠는 그냥 씩 웃고 말았지.

 

누리야.
전쟁의 반대는 무얼까? 아빠는 ‘평화’라는 말을 쓰고 싶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이 시기에, ‘JSA’나 ‘웰컴 투 동막골’에서 보이는 분단구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사회 안팎에서 진행되길 기대했단다. 그런데 오히려 남북대결구도를 부추기거나 반공을 강조하는 듯한 면이 영화와 드라마 곳곳에 넘쳐나는 것은 유감이지 않을 수 없단다. 예전에 누리와 함께 보았던 영화 ‘의형제’도 포장된 반공영화라고 한다면 공감하겠니?

 

“ 반공이라는 게 무언데 아빠는 그렇게 문제를 삼는 거야?”
혹시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르겠다. 아빠는 ‘반공’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란다. 그 안에 담겨있는 분단의식과 냉전대결 구도를 염려하는 거지. 본디 ‘사상’이라는 것은 다양성을 전제로 한단다. 반대를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극단화되어 획일화되거나 인간성을 파괴하고 학살까지 이른다면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단다. 이러한 비극의 가장 극단적 형태가 바로 한국전쟁이었단다. 이념갈등이 빚어낸 인류최대의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겠구나.

 

우리민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잔인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지혜는 ‘공존 공생의 해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포화 속으로’가 아닌 ‘평화 속으로’ 우리 남북민족이 함께 손 맞잡고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누리야. 벌써 8월이 되었구나.
지난주 7월 27일이 무슨 날인지 아니? 휴전협정이 맺어진 날이란다. 아직도 우리 한반도는 전쟁이 끝난 게 아니란다. 잠시 전쟁을 쉬고 있는 게 ‘휴전’의 의미란다. 이제 이것을 ‘종전’이라는 말로, 아니 ‘평화’라는 말로 바꾸어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단다. 아니 너무 늦었다는 말이 맞을 거다.

8월은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지 백년이 되는 때이기도 하고 나라를 되찾은 지 65주년이 되는 달이기도 하다. 이속에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지혜는 7.4 남북공동성명, 6.15 남북정상회담, 10.4 남북정상 합의문에 이미 충실히 담겨져 있단다.

 

세계가  탈냉전 글로벌 시대로 접어든 지가 십년도 훌쩍 넘겼는데 지구상에 유일한 냉전분단 국가로 한반도가 남아있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란다. 이제 우리 한반도에도 하루빨리 평화시대가 정착되어 전쟁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때가 오길 바란다. 그것이 한쪽이 한쪽을 완전히 제압하거나 흡수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증명될 대로 증명된 지금,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 확장시켜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구나.

 

역사라는 게 일직선모양으로 쭉 발전하는 게 아니라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지만 커다랗게 보면 강물처럼 희망의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 누리가 성장하여 사회인이 되었을 때는 이미 한반도에 평화의 물결이 완전히 뿌리내리는 때가 되기를 아빠는 소망한다. 그래서 임진각 너머 도라산역에서 파리행 열차를 타고 누리와 함께 북녘 땅을 지나 만주벌판,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여행을 함께 하자꾸나. 아빠는 이 시대를 준비하는데 자그마한 벽돌 한 장을 얹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복이 없을 것 같구나.

 

오늘은 이만 줄이마. 안녕.

 

8월 첫날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