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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여인, 과연 그는 철 같은 여자였을까? -누리의 영화 감상문

김포대두 정왕룡 2012. 8. 18. 23:22

 

철의 여인, 과연 그는 철 같은 여자였을까?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바로 ‘메릴 스트립’이라는 한 여배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나오는 카리스마를 무척 좋아했다. 중년의 늙어가는 몸에서 내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얼굴 때문도, 목소리 때문도 아니었다. 수많은 연기와 오래 된 세월 속에서 향 베인 손수건처럼 깊은 향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이 배우를 한마디로 하자면 ‘프로’! 이 두 글자로 축약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기에 나는 이 배우가 나온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본 것이 바로 ‘철의 여인’이었다.

 

 

처음 내가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철의 여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주인공에게 무슨 스토리가 있는지, 이 시대의 사건들이 무엇인지, 이 주인공이 누군지! 그야말로 머릿 속은 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는 진공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 지식들이 나에게 그야말로 순수하게 그 인물을 탐구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생각한다. 만약 내가 사건에 대한 여러 견해를 들었다면, 이 주인공에 대한 논문을 하나라도 읽어 보았다면, 과연 영화를 본 후의 소감은 단연 100% 내 생각이라 말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이 배경 지식을 조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우선 영화는 ‘철의 여인’이라고 불려 졌던 마가렛 대처의 늙고 쇠약한 현재 모습부터 시작 된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치매 초기의 할머니이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아직도 확고하고, 굳건한 세계로 가득 차있다. 그 점을 보여주기도 하며 인상 깊었던 부분이 바로 의사에게 건강검진을 받는 장면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남편을 떠나보낸 심정이 슬프시죠? 괜찮아요, 그건 자연스러운 거니까요.’라고 기분을 묻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은 너무 기분을 중요시해요. 언제나 ‘기분이 어때?’라고 물어보곤 하죠.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라고 말해주세요. 지금은 생각과 아이디어, 그것들이 내가 흥미 있는 것이에요.” 이 말 한 마디에서, 데카르트의 명언이 생각난 까닭은 무엇일까? 그야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한 줄의 명언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에 옮긴 사람이 아니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마무리를 짓는 노년기를 허송세월로 보내곤 한다. 몸이 삐거덕거리니 머리도 삐거덕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마가렛은 끊임없이 생각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주관을 내세웠다. 고집이 아닌, 주장 말이다.

 

 

마가렛 대처는 처녀 시절부터 총리 시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굽힌 적이 없었다. 어디서 테러가 일어났다더라,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 했다더라 등의 말들이 곳곳에서 나오는 순간에도 마가렛은 자신의 의견을 대영제국의 밝은 미래라 주장하였고 사람들에게 외치었다. “타협보다 정의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위한 일에 타협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들에서 나는 여러 가지 미묘한 감정들을 느꼈다. 그 미묘한 감정을 느낀 일이 바로 노조를 탄압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였다. 정부에 항의하며 격한 시위를 벌이는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진압군과 싸우며 피를 흘리고 아이들이 다치는 모습들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대처의 정치 활동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마가렛의 정책은 영국의 경제문제를 뿌리부터 해소하지 못 하였다. 실업자가 실업자인 이유를 개인에게만 귀결시켰다.” 또 어떤 사람들은 대처의 정치 활동을 지지하며 이렇게 말한다. “위기를 극복해내려면 때론 강경한 대책도 필요하다. 대처는 국가의 위기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때론 권력을 떠날 줄도 알았던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쉬운 점도 있고, 배워야 할 점도 분명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노조탄압에 대해선 아쉬운 점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이 ‘다수를 위해선 소수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 법’ 이라고는 하나, 그건 투표에서나 해당 되는 말이지 인생에서는 해당 되는 말이 아니라 생각했다. 영화 중에 대처의 말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것은 민생의 안정입니다.” 그녀에게는 시위를 벌이는 노조는 국민이 아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다수를 위해선 소수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 법’을 실천 한 장본인 인 것일까?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그 노조의 폭력적인 시위 때문에 다른 많은 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시민의 안정을 위해 노조를 탄압 한 것이라면 최소한 지금 21세기에는 노조의 시위가 급격히 줄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강압적으로 눌렀기에 줄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줄은 그러한 결과 말이다. 대처가 노조탄압이 곧 시민의 안정이라 생각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정책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은 것은 엄연히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들이 대처가 주장한 ‘민생안정’을 유지 해왔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대처의 정책이 수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주장이었다면, 그 정책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올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도 영국은 굴러가는 쳇바퀴처럼 여전히 노조의 시위는 불타고 있다. 똥도 치우면 쓰레기가 되는 것이고, 물을 뿌리면 거름이 되는 것이다. 치우자면 수많은 사람들이 쓰레받기가 되어 똥을 직접 치워야한다. 거름이 되자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골칫덩이가 아닌 보배이다. 대처는 노조를 치우는 방법을 채택했지만, 나는 곧 머지않아 노조를 거름으로 만들 수 있는 위인이 등장 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한다. 21세기에는 소통이 중요하다. 윗 사람은 아랫 사람과 소통하고, 아랫 사람은 윗 사람과 소통하는 그러한 모습 말이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결코 물과 기름의 사이가 아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처럼 시간이 지나면 결국 섞여 하나가 되는 그러한 세상이다. 만약 그녀에게 ‘소통’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있었더라면, 지금과는 또 다른 역사가 나왔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영화를 보면서 이러한 방면에서는 대처에게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굳은 결단력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보고 느낀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영화 중에 나오는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당신이 옳다. 인생은 확실한 것이 없고 오로지 기회만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이런 구절에 위안을 받고야 말았다. 17년이란 시간 중에서 첫 임원선거에 나가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 말은 나에게 매우 큰 자신감을 주었다. 주변에서 장난으로 ‘네가 할 수 있겠어?’라는 말도 평소에는 가볍게 받아 들였을텐데,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 말들은 진심으로 느껴지고, 큰 돌이 되어 내 맘 속에 떨어졌다. ‘난 할 수 있어!’는 ‘내가 진짜 할 수 있나?’라는 의문이 되었고, 그 의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만 계속 되뇌이는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영양가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만 것이다. 그때 이 대처의 굳은 결단력이 나에게 힘을 준 것이다. 이 영화에서 대처가 총리에 오르기까지는 매우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남자 중심인 정치 사회에서 여자가 발을 들인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으며, 나라망신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 여성 총리, 마가렛 대처는 꿈도 못 꿀 일을 꿈 꿨으며, 결국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목소리는 너무 앵앵 거려요. 여성이 정치에 발 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싫어하죠. 그 목소리부터 어떻게 바꿔 봐요.” 라고 말하자 대처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라 내 말이예요.” 이렇게 단정 짓는 모습이 어떤 사람에게는 고집스러워 보였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여성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그녀는 ‘배짱’이라는 뿌리로 첫 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곧 임원선거를 ‘안 뽑히면 어떡하지?’라는 마음 가짐이 아닌, '결과는 상관 없으니 일단 부딪혀보자!‘라는 배짱 가짐으로 바꿔버렸다.

 

 

비록 그녀의 타협 없는 주장이 때때로는 많은 사람들을 이해 시키지 못 했던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정신력을 높게 사고싶다. 적어도 그러한 굳건한 신념은 남의 눈을 의식하며 이미지 관리를 더 중요시 생각하며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보다는 천배 만배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통령의 독도발언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과 입장이 뒤섞여있는 이 상황에서, 그러한 생각들은 내 가슴에 더욱 더 깊이 새겨졌다. 남들의 여러 개의 눈으로는 세상을 바라 볼 수 없다. 결국 세상을 바라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눈은 딱 하나, 나와 연결 되어 있는 눈이다.

 

 

 

소련은 그녀의 강인한 리더십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했는데, 여기서 왜 철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을까? 이 또한 나의 궁금증 중 하나였다. 그 당시의 철을 연상하자면 단단한 것, 잘 깨지지 않는 것. 이러한 모습이 연상 될 것이다. 그녀에게 철이란 사물을 빗댄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붙여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더 중요시 여겼던 것은, 결국 철도 ‘영원히 단단한 것’은 아니란 것이었다. 철도, 쇠도, 구리도 결국 불이 가해지면 녹아 흘러 내린다. 더 이상 단단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나는 대처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총리에서 내려오고 늙은 치매 노인에게 한 번도 쌍둥이 자녀들이 찾아오지 않는 장면에서 말이다. 그녀의 휘황찬란한 전성기 시절에 그녀에게는 국가만이 있었을 뿐, 가족은 없었다. 대처의 자녀들에겐 크레파스로 그린 첫 작품을 칭찬 해줄 엄마는 없었다. 언제나 텅텅 빈 집구석, 하루에 얘기를 한 마디 조차 나누지 못 하는 엄마. 그러한 태도는 자녀에게도 상처로 남겨졌고, 또한 대처에게도 단단한 못이 되어 마음에 박혔다. 결국 그녀는 휘황찬란한 전성기를 얻은 대신 자녀를 잃은 것 이다. 아무리 단단한 ‘철의 여인’ 이라 했어도, 자녀의 앞에서도 그렇게 칼 같을 수 있었을까?

 

일 때문에 사랑을 주지 못 했을 때, 대처는 아무렇지 않게 ‘난 컵이나 닦으면서 죽을 순 없어!’라고 말 할 수 있었을까? 결국 아무리 단단한 철의 여인이었더라도, 대중에게 수많은 비난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꼿꼿이 세울 수 있는 여인이었더라도 자녀에게는 한 없이 녹아 흘러내리는 엄마일 수밖에 없었다. 철 같은 그녀에게 자녀들은 뜨거운 불이자, 미안함이었다. 영화에서 결국 그녀는 죽은 남편의 환상이 보이는 늙은 노인으로써 텅 빈 집을 혼자 지내곤 한다. 그리곤 그 환상조차도 “당신은 혼자서도 잘 할 거예요. 늘 그래왔던 것처럼.”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날 때, 대처는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이 아직 떠나지 않길 바래요. 나 혼자서는 안 되요.” 어떤 사람들은 마가렛 대처를 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철의 여인이라 일컫지만, 나는 그렇기에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보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더 깊게 와 닿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매우 우연찮은 이유였지만, 결국 그 우연은 또 나에게 넓은 시야를 가지게 해 주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리었던 마가렛 대처는 결국 끝에 가서는 그저 ‘사람’으로 느껴졌다. 때로는 강인하고 굳건하지만, 때로는 한없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람’말이다. 후세에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는 미지수다. 그녀의 정책들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난 그녀의 ‘자신감’을 지지하고 싶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비현실적인 일이라도, 주위에서 불가능하다고 외쳐도! 그것을 결국 ‘이 일은 가능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그런 면모를 이 영화에서 하나 배워갈 수 있었다. 자신의 신념이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그것은 적어도 자신에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남지 않겠는가? 난 나중에 내 신념을, 나 자신을 넘어서 내 주위 사람들에게까지도 부끄럽지 않은 신념을 만들고 싶다.

 

 

철의 여인을 넘은 꿈의 여인! 생각만 해도 전율이 이르는 단어이다.

나에게 먼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