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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안쪽 -조강리에서 <김훈 자전거 여행 에세이>

김포대두 정왕룡 2015. 1. 11. 16:14





<김훈 자전거 여행에세이-1> 
無爲의 자연 향해 끝없이 말을 거는 인간 

풍경의 안쪽-조강리에서 

풍경은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덜 틀릴 것 같다. 풍경은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다. 풍경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풍경은 아름답거나 추악하지 않다. 풍경은 쓸쓸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펼쳐져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은 광막해서 나는 그 권역의 넓이와 가장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쉴 새 없이 작용해서 바쁘고, 풍경은 그 바쁜 자연의 외양으로 드러나있다. 무위자연의 ‘무위’는 그 바쁜 것들에 손댈 수 없고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의 속수무책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겨우 이해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들여다 보면서 공자는 말했다. 

―흘러가는 것은 저러하구나. 

‘저러하다’니, 어떠하다는 말인가. ‘저러하구나’라는 말은 ‘흘러가는구나’라는 말처럼, 나에게는 들렸다. 그래서 공자의 말은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은 하나마나한 말인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공자의 그 말을 읽을 때마다 언어를 버리거나 언어를 넘어서려는 성인의 조바심을 느꼈다. 흐르는 물가에서, 성인은 언어와 자연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에 당도한 것이다. 

그 경계에서, 공자는 자연을 상대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기 보다는 언어를 풀어서 놓아주고 곧바로 자연 쪽으로 건너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는 끝끝내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공자는 그 경계를 넘어가지 않고, 다시 인간의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 부자유한 한계 안에서 공자는 아름답다. 시선을 거두어 안쪽으로 향한 공자가 ‘저러하구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자연 쪽으로 건너가려는 자의 말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의 독백처럼 들린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라고, 김소월이 그 단순성의 절창으로 노래할 때도, 그 노래는 말을 걸 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에게는 들린다. 아마도 그것이 모든 서경시(敍景詩)의 운명일 것이다. 

풍경은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지만, 인간이 풍경을 향해 끝없이 말을 걸고 있다. 그러므로 풍경과 언어의 관계는 영원한 짝사랑이고, 언어의 사랑은 짝사랑에서 완성되는데, 그렇게 완성된 사랑은 끝끝내 불완전한 사랑이다. 언어의 사랑은 불완전을 완성한다. 

대중가수 이태원은 ‘솔개’라는 노래에서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나르는 솔개처럼”이라고 노래했다. 그 노랫말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오랜 마음고생 끝에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다 우리는 나르는 솔개가 아니다 공자도 흐르는 물가를 말 안하고 지나치지는 못하셨다. 그러나 ‘저러하구나’라는 한마디로 사태를 정리하고 수다를 떨지 않는 성인의 압축능력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나에게는 그런 복이 없다. 

남·북의 조강마을은 같은 노을에 물든다 

조강(祖江)은 여러 강들의 통합으로서 깊고 크다. 넓고 느리게 흘러서 일몰의 서해로 나아간다. 한반도 중부내륙의 모든 수계(水系)는 조강에서 합쳐져 소멸한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합쳐서 내려온 한강은 김포 들판의 북단에 이르러 임진강과 만난다. 거기까지 흘러온 임진강은 이미 한탄강과 그 유역의 모든 수계를 이끌고 가득 차있다. 크고 넓은 강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만남의 흔적이 없다. 강들은 본래 그러한 것처럼 만난다. 거기서부터 조강은 강화도 북단과 개풍군 남단 사이로 유로(流路)를 열면서 서해로 나아가다가 다시 개성에서 내려오는 예성강을 끌어들인다. 

하구의 조강은 물이 아니라 시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면서 바다에 닿는다. 강이 바다로 다가갈수록, 거기까지 따라온 산들도 낮고 멀어져서 일몰의 조강은 광막한 소멸의 정서 속에서 아득하고 막막하다. 강들은 이 헐거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소멸하는데, 물들이 다시 이 하구로 당도하는 것이어서 조강은 모든 물들의 만남이고 해체이며 신생이다. 이 소멸의 하구는 다시 모든 수계들의 먼 상류 쪽 시원을 끌어당겨 바다에 이르게 한다. 여기는 내 분단조국의 멱통이다. 

밀물에, 조강은 깊숙이 밀린다. 서해의 밀물은 강을 가득히 채우며 달려들어, 거대한 강물이 더 큰 바닷물에 밀려나면서 강은 거칠게 뒤챈다. 산의 아랫도리가 물에 감기고 모든 수계는 상류까지 부풀어 숨차다. 밀물의 조강에서는 바닷물의 압박으로 숨을 몰아쉬는 강물의 헐떡거림이 들린다. 

썰물에, 조강은 가쁜 숨을 길게 내쉬듯이 바다로 내닫는다. 강의 숨결이 낮고 멀어질 때, 상류의 수계들은 숨통이 열려가는 하구로 달려들고, 물이 몰려간 먼 바다 쪽으로 젖어서 빛나는 저녁의 개펄이 들어나, 물이 멀리 몰려간 개펄은 빛으로 가득 찬다. 

조강의 그믐사리는 새벽에 만조를 이룬다. 강은 시간의 힘으로 밀리고 쓸린다. 그믐사리가 지나면 물의 대고조(大高潮)는 점점 늦어져서 조강의 보름사리는 석양 무렵에 만조를 이루어, 그 큰 강의 관능은 시간과 교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강은 밀려들고 몰려나가는 물의 소리로 수런거리는데, 그 소리는 인간의 감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만조의 강이 숨을 뒤채일때, 그 소리는 모든 소리가 동시에 뒤섞여 버리는 백색의 잡음이다. 

그 소리는 아무런 스펙트럼을 이루지 않고, 어떠한 음의 권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 소리의 질감과 표정은 인간의 언어나 미의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의 소리와 짐승의 소리에 길들여진 인간이 듣기에 무의미하고 무표정하고 무계통하고 무정형하다. 그 소리는 혼돈의 밑바닥에서 울리는, 무서운 소리다. 보름사리의 조강에서 그 소리는 늙은 시간이 물러나가고 새로운 시간이 세상으로 밀려오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하구는 내 분단조국의 서부전선이다. 

산하는 거기에 얼룩진 역사의 표정을 신속히 지우고, 산맥은 봄마다 새잎으로 덮인다. 보름사리에 조강 물 수런거리는 소리는 적막의 소리다. 그 소리에는 역사의 찌꺼기가 묻어있지 않다. 

그러나 저무는 조강에서는 산하가 모조리 지워버리고 남은 그 적막이 오히려 역사의 표정처럼 보인다. 조강진(祖江津)은 김포군 월곶면 조강리와, 강건너 개풍군 조강리를 잇는 내수면 뱃길이다. 강심을 따라 휴전선이 그어졌고, 같은 이름을 가진 나루터의 두 마을이 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한강하구에 군사분계선이 획정되자 나루는 사라졌고 물가의 주민들은 소개되었다. 

고려 초에서 조선이 끝날 때까지 조강진은 번창한 나루였다. 전국에서 걷히는 세곡의 거의 대부분은 서해의 뱃길을 따라 조강나루로 운송되었다. 조강나루에 쌓인 세곡은 다시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가거나 예성강을 거슬러 개성으로 갔다. 조강은 조수가 사나워 썰물이면 배들은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했고, 밀물이면 바다로 나아가지 못했다. 조강나루는 날마다 물때를 기다리는 선단들로 장관을 이루었고 주막과 여인숙과 짐꾼들로 북적거렸다. 

조강은 지금 적막하다. 조강은 태초의 적막으로 돌아갔고, 인간이 해독할 수 없는 자연의 백색음향이 물살을 따라 밀리고 쓸린다. 날마다 강화 쪽으로 해가 저물어, 북쪽 조강마을과 남쪽 조강마을이 같은 노을에 물들고, 젊은 초병은 저쪽으로 돌아서있다. 

일산에서 떠난 자전거는 느리게 북상했다. 자전거는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이 하구에 닿는다. 자전거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거기는 일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