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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21세기의 거울-누리의 영화 사도 관람평

김포대두 정왕룡 2015. 9. 26. 11:24

<사도, 21세기의 거울>



 사도.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이제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식상할지도 모를 일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왜 하필 이 소재를 선택하였을까? 그렇다고 크게 각색을 한 것도 아니요, 정치적 해석보다는 그저 아버지와 아들의 감정 변화만을 표현하려는데 주력하였다. 어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것만큼 신선한 소재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오늘날 한국 사회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영조 & 사도세자)


 영조, 자기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다. 암기에 있어서는 수백 문자 중 단 한 글자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형을 죽이고 왕위를 오른 살인자라는 소문과, 천한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것에서 큰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때문인지 굉장히 깐깐하고,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15시간 이상을 정무(政務)에 힘썼으며 문치주의를 지향하였다.


사도세자, 영조의 아들. 늦둥이로 태어나 돌이 지나자마자 세자로 책봉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적 소양보단 무예에 소질을 보였고, 영조는 이를 탐탁치 않아하였다. 영화 초반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강했으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아버지의 핍박에 점차 원망과 분노가 쌓이게 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사도세자의 감정 변화라 할 수 있다. 초반의 어린 사도세자는 영특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하지만 갈수록 학문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자 영조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영조가 어린 사도세자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영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아버지를 원망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였고, 또한 대리청정을 할 때에는 영조보다도 놀라운 통찰력과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완벽함을 추구했던 영조의 성에는 차지 않았고, 무엇을 하던 계속 되는 핍박은 결국 그를 삶의 기준도, 자유의지도 없는 껍데기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을 바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한다. 엄한 가정 속에서 착한 아이라는 반응을 듣기 위해 항상 타인의 눈치를 보고, 갈등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누르는 것이다. 어쩌면 사도세자가 너무 일찍 부모 곁을 떠나 세자교육을 받은 것이 이 콤플렉스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기록 ‘한중록’을 보면 “그것이, 동궁전에 보낸 것이, 세자를 일찍 책봉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고 이것이 부모와 자식의 대화를 단절하는 시작이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대화와 소통이 없는 부모와 자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 마침내 사도세자는 그간 쌓여있던 분노와 스트레스가 폭발하였고, 폭탄을 정통으로 맞은 부자(父子)의 끝은 결국 비참한 죽음이었다.


(강남 엄마)


대화가 단절 된 부모와 자식 관계는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자식은 부모의 꿈을 이루기 위한 꼭두각시라는 말도 그리 낯설지 않다. ‘강남엄마’ 이제 이 단어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리하며 공부 이외의 것은 모두 배제하는 부모를 뜻한다. 한국의 교육열은 전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다. 오죽하면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빽빽이 줄 지어서 있는 학원가라고 한다. 한국 상위 1%에 들기 위해 자식을 24시간 돌리는 부모들은 그것을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로 일축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본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행복함을 느껴야 하는 것인데, 왜 한국의 청소년은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할까? 통계청의 '2012년 청소년 통계'에 의하면 2010년 1년 동안 15~24세 청소년 사망 원인 중 1위가 바로 자살이다. 인구 10만 명당 13명의 청소년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이 현실을 직접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듯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을 공부방에 가둬놓는다. 그리고선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말로 합리화한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네가 왕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이 영조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사람이 있은 후에야 법도와 예의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성공도, 사회적 지위도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결코 주객전도 돼서는 안 될 일이다.


 사도세자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이 영화의 핵심문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항상 목표에 어긋나는 ‘잘못 쏜 화살’이겠지만, 사도세자는 그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하늘을 가르는 ‘자유로운 화살’이었음을 뜻 한다. 결국 이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은 결국 ‘남’에게 ‘나’이기를 요구한 이기적인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다. 돌은 돌이기에 아름답고, 꽃은 꽃이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다 제각기의 고유한 멋이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나를 바라서도 안 되고, 나를 타인에게 맞추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를 단순히 18세기에 일어난 역사적 비극 이야기로 볼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비추고 있는 ‘거울’로 마주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