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원로 김동길 별세’
94세로 일생을 마감한 김동길 앞에 여러 언론들이 ‘보수원로’ 라는 수식어를 붙여줬다.
하지만 학창시절, 그의 이름은 우리 세대들에게 보수인사가 아닌 ‘행동하는 재야 지식인’의 상징이었다. 유신의 폭압에 맞서 감옥행도 마다하지 않으며 비판과 저항의 길을 가던 그는 이 땅 지성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등대이기도 했다. 시국사건이 보도될 때면 그의 이름은 함석헌 문익환 한완상 등의 이름과 함께 있었다.
고교시절 그가 지은 단상집 ‘사랑의 길 자유의 길’을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젊은 날 그의 이름 석자는 젊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아니 거기에서 그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2010년으로 기억된다.
김포 시민대상 대상 ‘명사초청’ 강사로 그가 온다했을 때 “극우보수 인사를 시민의 혈세를 들여 초청한 의도가 무엇이냐"고 시의원으로서 담당 공무원에게 따져 물었다. 당시 ’김동길‘ 이름을 곱씹으며 씁쓸함이 밀려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행동하는 지식인은 사라지고 극우보수 인사의 껍데기로 다가온 김동길이라는 이름이 눈앞에 왔을때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는 이미 훨씬 전부터 극우반공 이념의 늪으로 계속 빠져들어 결국 자신이 그렇게 저항했던 유신세력과 한편이 되어버렸다. 그와 함께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는 자기부정의 길을 갔다.
“사람은 죽는 순간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수복 후 귀환하는 과정에서 인민군의 총탄에 쓰러졌다면 이순신 장군처럼 지금은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을 겁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한 그의 책 ‘사랑의 길 자유의 길’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른다. 청소년기 젊은 나이에도 저 구절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그의 철학적 사유와 학문적 깊이의 부족함에서 오는 단상임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위트 넘치는 언변과 화술로 사회적 생명력을 이어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94세로 생을 마감한 그의 소식을 접하며 사람에게 장수하는게 꼭 축복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럼에도 우리시대 ‘일그러진 젊은날의 초상’들이 김동길 그 말고도 한두명이 아닌데 유달리 그의 이름이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뭘까? 나이를 먹어가며 젊은 시절 자신의 생각을 견지 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함께 스치는 가을날이다.
그래도 그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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