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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에도 햇볕 들지 않는 광해군의 묘

김포대두 정왕룡 2006. 8. 12. 14:18
한 여름에도 햇볕 들지 않는 광해군의 묘
깎이고, 깨지고, 허물어지고... 왕의 무덤인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텍스트만보기   서부원(ernesto) 기자   
▲ 문성군부인 유씨와 함께 묻힌 광해군의 묘는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 서부원
'폭군' 광해군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느 왕릉처럼 곧게 뻗은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울타리처럼 봉분을 두른 널찍하고 화려한 곳이리라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처럼 초라하게 버려진 숲 속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은 하질 못했습니다.

재위 15년 동안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주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끝내 쫓겨나고 만 불운한 임금. 광해군은 죽은 지 350여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후세들을 맞고 있습니다.

무더웠던 지난 주말 어렵사리 광해군 묘를 찾았습니다. 주소만 가지고는 도저히 찾을 길 없는 외딴 곳이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근교이고 보면 주말이나 요즘 같은 휴가철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 번쯤 들를 법한 위치이지만 묘 주변에 사람들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 울타리 너머 광해군 묘로 가는 길. 저 끝에 묘가 보인다.
ⓒ 서부원
찾아가는 길은 폭이 좁아 교행은 어렵겠지만 웬만한 버스는 오를 수 있도록 포장이 돼 있습니다. 광해군 묘가 자리한 곳에 서울의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원묘지가 꾸며져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동차로 찾아가기는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광해군 묘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적지 표지판 앞에 차를 세워두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면 황톳빛 산길에는 사람의 발자국 하나 찍혀 있지 않습니다. 그 길 끝, 가파른 산 중턱에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가 묻힌 쌍릉이 있습니다. 명색이 왕의 무덤인데 장삼이사의 그것보다도 더 초라한 모습에 처연함이 묻어납니다.

▲ 사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오른쪽으로 보이는 울타리를 지나쳐 가야 한다.
ⓒ 서부원
쌍릉 앞에 세워진 묵직한 석등은 언제 그랬는지 모서리가 심하게 패여 있고,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이름 적힌 비석은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채 군데군데가 정 맞은 듯 생채기가 나 있습니다. 누구에겐가 해코지 당한 자국인 듯합니다. 입구 양옆으로 서 있는 문인석의 표정도 어둡게만 느껴집니다. 봉분엔 그 흔한 호석(護石)도 둘러쳐져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잘 자라 준 잔디가 허물어질 듯한 봉분을 잘 잡아주고 있을 뿐입니다.

석등 아래 부분의 흙이 패이면서 그렇지 않아도 좁은 묘역이 더욱 좁아지게 생겼습니다. 대충 방위를 판단해보건대 남향을 하고 있지만 숲에 가려 햇볕이 들지 않으니 아늑하다거나 평온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쫓겨난 광해군의 가엾은 운명과 비슷한 곳이라고나 할까요.

▲ 모서리가 심하게 훼손된 석등의 모습.
ⓒ 서부원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였다는 죄목으로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서인들에게 쫓겨나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67세의 일기로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게 되는데, 제주도로 가는 뱃길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푸른 물결 성내 굽이치는 저녁녘
멀리 푸른 산도 가을의 슬픔을 띠었도다
내 마음 한결 왕자 보기를 싫어하건만
나그네의 꿈엔 용상이 자주 보이도다
나라의 존망은 얻어 들을 길 없고
저녁놀 강산을 뒤덮을 제 홀로 고주에 엎드렸도다


도성 천리 밖으로 떠나야 하는 광해군의 심경이 도드라집니다. 아울러 자신의 폐위가 몰고 올 조선의 어두운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시구는 그의 놀라운 혜안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폭군', '폐주' 등으로 인식돼 왔던 광해군이 최근 탁월한 정치력과 애민 사상을 지닌 군주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논의하고 재평가해야 한다면 그 첫 번째 작업이 바로 광해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초라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지금의 광해군 묘를 찾는 발걸음도 잦아질 것이며,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사적지로서 당당히 자리매김될 것입니다.

큰 도로에서 광해군 묘로 접어드는 길 입구에는 '사릉(思陵)'이 있습니다. 숙부에 의해 쫓겨나 유배지 영월 청령포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임금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능입니다. 역사에 고스란히 남은 안타까운 사연이 왜 이리 많나 싶어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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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묘 찾아가는 길 : 홍릉과 유릉이 있는 남양주시 금곡사거리에서 퇴계원 방향으로 1.5킬로미터쯤 가다보면 사릉 못 미처 오른쪽으로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2킬로미터쯤 가면 '영락교회 공원묘지' 정문이 왼편으로 나오는데, 그 길로 곧장 2~3백 미터쯤 가면 오른쪽 울타리 너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