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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5년 동안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주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끝내 쫓겨나고 만 불운한 임금. 광해군은 죽은 지 350여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후세들을 맞고 있습니다. 무더웠던 지난 주말 어렵사리 광해군 묘를 찾았습니다. 주소만 가지고는 도저히 찾을 길 없는 외딴 곳이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근교이고 보면 주말이나 요즘 같은 휴가철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 번쯤 들를 법한 위치이지만 묘 주변에 사람들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광해군 묘가 있음을 알려주는 사적지 표지판 앞에 차를 세워두고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면 황톳빛 산길에는 사람의 발자국 하나 찍혀 있지 않습니다. 그 길 끝, 가파른 산 중턱에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가 묻힌 쌍릉이 있습니다. 명색이 왕의 무덤인데 장삼이사의 그것보다도 더 초라한 모습에 처연함이 묻어납니다.
석등 아래 부분의 흙이 패이면서 그렇지 않아도 좁은 묘역이 더욱 좁아지게 생겼습니다. 대충 방위를 판단해보건대 남향을 하고 있지만 숲에 가려 햇볕이 들지 않으니 아늑하다거나 평온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쫓겨난 광해군의 가엾은 운명과 비슷한 곳이라고나 할까요.
푸른 물결 성내 굽이치는 저녁녘 멀리 푸른 산도 가을의 슬픔을 띠었도다 내 마음 한결 왕자 보기를 싫어하건만 나그네의 꿈엔 용상이 자주 보이도다 나라의 존망은 얻어 들을 길 없고 저녁놀 강산을 뒤덮을 제 홀로 고주에 엎드렸도다 도성 천리 밖으로 떠나야 하는 광해군의 심경이 도드라집니다. 아울러 자신의 폐위가 몰고 올 조선의 어두운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시구는 그의 놀라운 혜안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폭군', '폐주' 등으로 인식돼 왔던 광해군이 최근 탁월한 정치력과 애민 사상을 지닌 군주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논의하고 재평가해야 한다면 그 첫 번째 작업이 바로 광해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초라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지금의 광해군 묘를 찾는 발걸음도 잦아질 것이며,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사적지로서 당당히 자리매김될 것입니다. 큰 도로에서 광해군 묘로 접어드는 길 입구에는 '사릉(思陵)'이 있습니다. 숙부에 의해 쫓겨나 유배지 영월 청령포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임금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능입니다. 역사에 고스란히 남은 안타까운 사연이 왜 이리 많나 싶어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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