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돌목돈대 전투, 한 장의 사진 앞에서 | ||||||||||||||||||||||||||||||||||||
-광성보에서(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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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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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전투 대부분의 사상자가 이곳 손돌목 돈대에서 발생했습니다. 한계단 한계단 오를때마다 고지를 향해 돌진하는 미군들과 돈대를 사수하기 위해 죽음으로 맞서 싸우는 조선군들의 함성이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광성보 인근지역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아, 염하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지리적 특징이, 이곳을 신미양요 최대의 격전지로 만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사진자료를 계단입구 안내판에서 다시 보아서인지 포연 자욱한 전투현장이 되살아나는 듯 합니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조선병사 시신들을 미군으로 추정되는 두사람이 내려다 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숨이 멎은 조선병사들은 양팔을 벌린 채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고 고지를 점령한 미군들은 이들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한데 뒤엉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이 사진은 아마도 미군측의 종군 사진사가 찍은 듯 합니다.
중세 십자군들이 성지회복을 명분으로 수없이 저질렀던 양민학살처럼, 아메리카 개척당시 백인들이 서부에서 자행했던 인디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처럼, 호주대륙에 이민 온 백인들이 사냥개를 풀어놓으며 여가용으로 즐겼던 원주민 학살사냥처럼, 조선인들을 대하지만 않았다면 그나마 다행일런지 모릅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각기 태어나 자기나라 권력담당자들의 명령에 의해 조선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공격자와 방어자의 입장에서 마주친 생면부지의 동서양젊은이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운명이 엇갈린 채 사진 속에서 마주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에 의해 이미 저승길을 떠난 조선의 청년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듯한 미국 청년들의 심정이 궁금해 집니다.
그렇지만 백년의 세월도 훌쩍 넘겨버린 지금, 당시 미군들 역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사진속 주인공인 이들 모두는, 지금은 하늘나라 한켠에서 염하와 광성보를 함께 내려다 보며 ‘그때 우리가 왜싸웠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죽은 뒤에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부질없는 짓이 바로 전쟁일 것’입니다.
광성보 전투는 말이 전투였지 실제 양측의 피해기록을 보면 일방적 살상행위였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조선군 전사자가 350명, 부상자가 20여명이었던 반면 미군측은 전사3명, 부상자 10명에 그친 일방적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유달리 눈에 띠는 점이 있습니다. 전사자보다 부상자가 많은 게 일반적 전투의 양상인데 광성보 전투는 압도적으로 전사자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화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불사하는 조선군의 저항의지가 그만큼 뜨거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당시 미군측의 종군기록에도 나타납니다. 포로가 되기보다 투신이나 자결등의 방법을 통해 죽음의 길을 택했던 조선군의 장렬함은 미군측에게 경의로움을 느끼게 해 줄 정도였나 봅니다. 그런데 좀 더 꼼꼼히 들여다 보면 그러한 장렬한 죽음의 이면에는 ‘서양 오랑캐’의 포로가 되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두려움이 깔려 있었지 않았나 생각을 해봅니다.
저들이 우리를 미개한 야만인으로 보았듯이 우리 역시 그들을 ‘오랑캐’로 대했습니다. 이미 1842년에 난징조약이 체결되면서 청나라가 영국에게 굴복하였고 1853년에 일본이 미국에게 강제로 문을 열었습니다. 신미양요가 있기 2, 30년전에 중국과 일본에서 발생한 이런 대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너무도 어두웠습니다. 처음에는 문화적 야만인으로 깔보다가, 점차 대적하기에 역부족인 두려운 상대로 인식이 되면서 온갖 불안감이 조선 병사들의 마음을 뒤흔들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논개도 아니었고 심청도 아니었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염하의 물결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을때 훨씬 먼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던 손돌공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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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9월 08일 15:39:51 / 수정 : 2006년 09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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