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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의자 앞에서 -감포 가는 길(2)-

김포대두 정왕룡 2007. 1. 18. 17:49
빈 의자 앞에서 -감포 가는 길(2)-

 

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골굴암 마애불을 내려와 차에 오르는 길에 마주친 ‘빈 의자’ 앞에서 잠시 걸음이 멈춰졌습니다. 떠나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붉은색을 온몸으로 내뿜는 단풍나무 아래, 수줍은 새악시 마냥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는 내앞의  ‘빈 의자’는, 잠시 쉬어가라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주단을 깔아놓기라도 한 듯이 의자 위는 물론이고 그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인 단풍잎들이 계절의 훈훈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게 해줍니다. 지금 이순간이 아니면 자신의 화려함을 만끽할 수 없기에 ‘당신들은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 중 곱게 물든 몇몇 잎파리를 골라 책갈피에 끼워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잔잔히 바라보고픈 마음입니다. 주변풍경에 나 자신 또한 그저 하나의 소품으로 남고 싶은 심정에 젖어듭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 자신이 자연이라는 책갈피 사이에 끼워 넣어진 단풍잎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내가 자연을 선택한 게 아니라 자연이 나를 선택해서 자신들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란 보잘것 없는 미물을 내치지 않고, 천년역사의 골굴암 숲길에 자그마한 소품으로 맞이해준 자연의 넉넉함에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빈 의자’는 천년 전 이곳 골굴암을 최초로 조성할 때 숲속을 헤치며 오갔을 석공들의 거친 숨소리를 잠시 느껴보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그 당시엔 지금의 저 모습같은 ‘의자’는 없었겠지만, 석공들 역시 이 부근 어디에선가 잠시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땀을 닦아내며, 함월산 정상을 올려다 보았을 것입니다.

 

서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

 

나도 모르게 장재남의 ‘빈 의자’가 입에서 흥얼거려졌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70년대말 중학교 시절로 추억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종이달’이라는 드라마였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주연을 맡았던 추억의 스타 ‘유지인’과 상대역 ‘강태기’의 이름도 떠올랐습니다. ‘원미경’도 그때 주연급 조연으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입을 앞둔 수험생과 그 주변 가정의 고민과 갈등을, 가정교사의 눈을 통해 그려낸 사회성 짙은 드라마로, 그 당시 어린 중학생의 시선에 깊은 인상을 심어준  듯 싶습니다. 드라마는 갔어도 음악은 오래남나 봅니다.  주제곡으로 극 전개도중 사이사이에 불려졌던 노래 ‘빈 의자’가 저절로 흥얼거려 지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깊은 인상은 나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학교수업이 끝난 후 청소시간에 의자를 나르고 대걸레질을 하던 친구들이 서로 서로 이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던 장면이 떠오르니 말입니다. 그 당시엔 가사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장재남의 걸쭉한 목소리에 담겨져 나오는 구성진 가락에다 ‘빈 의자’란 낯선 노래제목이 사춘기 소년들의 가슴을 웬지  모르게 흔들었던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추억’이란 존재는 참 야릇한 친구인것 같습니다.
30여년의 세월속에 한참동안 잊혀져 있던 학창시절 기억의 자락들이 이곳 함월산 기슭의 ‘빈의자’ 앞에서 다시 찾아오니 말입니다. 마치 먼지가 뽀얗게 쌓인 창고속을 정리하던 중 무심코 발견한 소설책 한권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그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 어릴적 사진 한장을 바라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

 

노래 후반부를 마저 읊조리다 거기에 담겨진 ‘빈 의자’의 넉넉함이  ‘내안의 빈 의자’에도 존재하는지 잠시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웬지 대답에 자신이 없습니다. 무더기는 커녕  단 한사람이라도 와서 쉴 수 있는 쉼터조차 없는 내안의 각박함에 잠시 낯이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바쁜 여정에도 잠시 멈추어 서서 내안의 부끄러움을 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 함월산 ‘빈 의자’에 감사하며 감포바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입력 : 2007년 01월 18일 10:29:27 / 수정 : 2007년 01월 18일 10: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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