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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에서 -감포가는 길(3)-

김포대두 정왕룡 2007. 1. 25. 13:06
기림사에서 -감포가는 길(3)-

 

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골굴암과 함께 함월산 깊은 곳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경주 기림사는 그 위치의 독특함으로 세인들의 기억속에 영욕을 함께 한 곳입니다. 행정구역상 경주시에 속하였다 해서 도시 근교정도로 생각하고 찾아가면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경주 보문단지에서 감포를 향할 때 꼭 거치게 되는 길목이면서도 외진 곳에 놓여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광복전까지만 해도 불국사를 말사(末寺)로 거느릴 정도로 이 일대 최대 거찰로서 전국 31개 본산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접근성의 불편함 탓으로 불국사에 그 자리를 내주고 거꾸로 불국사의 말사가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가곡 ‘장안사’의 노랫말이 실감나는 곳이 바로 이곳 기림사가 아닌가 합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에 안은 토함산을 경계로 동해바다 쪽을 옛부터 ‘동해구(東海口)’라 하였습니다. 토함산의 산세가 동해에 이르러 그 기운이 사그라지는가 싶더니 다시한번 용솟음치며 바다를 품에 안은 곳이 기림사가 위치한 함월산 입니다.

 

토함산이 씩씩한 남성적 이미지라면 함월산은 ‘달빛을 머금은 산’이라는 뜻풀이에서도 나타나듯이 다분히 여성적인 이미지를 풍깁니다. 흙을 품은 토함산이건 달을 머금은 함월산이건 자연을 품어 안았다는 점에선 닯은 꼴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삼국시대부터 동남해안 일대에서 해적질을 일삼은 ‘왜구’의 출몰은 커다란 골칫거리였습니다. 토함산이 이러한 왜구로부터 서라벌을 지켜내는 최후의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면 동해에 인접한 함월산은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한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승병양성소로 추정되는 ‘진남루’가 함월산 자락 기림사 경내에 위치한 점은 자못 의미심장 합니다.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들어서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근거지였고 일제강점기에도 독립군의 은신처 역할을 하였다 하니 ‘호국불교’라는 말은 기림사의 상징적 용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기림사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 ‘장군수’의 존재입니다. 수많은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기림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중의 하나가 5종수(五種水)라 일컫는 다섯가지 샘물입니다. 특히 그중 3층석탑 옆의 ‘장군수’는 그 물을 마시면 용감무쌍한 장군을 낳게 된다는 신비의 영약이었습니다.

 

하지만 장군의 출현을 꺼려한 일본인들이 이 샘을 막아버려 현재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합니다. 하루빨리 ‘장군수’ 샘이 복원되어 오늘과 같은 저출산 시대에 이 물을 맛본 많은 사람들이 호국의 든든한 인재들을 다량출산하길 빌어보았습니다.

   
‘호국의 상짱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신라 문무왕입니다. ‘죽어서도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킬 것이니 자신을 바다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였던 왕입니다. 그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를 감포 앞바다에 장사지내고 그곳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절을 짓고 ‘감은사’라 이름 하였습니다. 죽어서도 호국의 신이 된 문무왕의 은혜에 감복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엔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장사지낸 감포에 행차한 후 서라벌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 기림사에 들러 근처 시냇가에서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외적의 침입을 미리 알려주는 피리인 ‘만파식적’을 동해의 용에게서 얻어 돌아오다가 쉬는 참에 잠시 옥대고리 하나를 풀어놓았는데 그것이 용이되어 하늘로 승천하였다 합니다.

기림사 계곡의 ‘용두연’은 이 전설로부터 유래한 이름입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했던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도 이곳을 거쳐갔다 합니다. 삼성각 뒤쪽을 오르다보면 후세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지어놓은 김시습 사당이 눈에 띱니다.

 

 ‘기림사’ 창건의 유래에는 인도 광유성인의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인도 범마라국의 덕망높은 승려인 광유성인의 아들이자 제자인 안락국이 그 스승의 권유로 동해안에 도착하여 함월산에 ‘임정사’를 세웠습니다. 그후 원효대사가 이 절을 확장하면서 석가모니 당시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 인근의 숲이름을 따서 ‘기림사’로 이름 붙였다 합니다. 공식기록엔 신라의 불교도입이 고구려 출신의 아도화상이 경북 선산일대에서 설법을 한것을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림사 창건설화는 대륙뿐만 아니라 바다를 통해서도 인도불교와 해양문화가 직수입 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도 승려들, 원효대사, 신문왕과 신라왕들, 왜구들, 김시습, 승병과 의병들, 독립군들.......’

천오백년의 세월속에 기림사를 거쳐갔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다시 감포행 발길을 재촉해 보았습니다.

   

 

 

입력 : 2007년 01월 24일 11:52:35 / 수정 : 2007년 01월 24일 11:5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