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재 가는 길 | |||||||||||||||||||||||||||||||||||||||
-월악산 미륵사지에서(1)- | |||||||||||||||||||||||||||||||||||||||
| |||||||||||||||||||||||||||||||||||||||
전국 어느장소 어느길이나 조금이라도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라치면 포장도로가 깔리고 관광명소화 하려는 상혼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곳만은 아직 사람의 손길이 비교적 덜 탄 곳이라 그런지 고향의 아늑함과 정겨움을 안겨줍니다. 온천욕을 좋아하시는 장모님을 모시고 수안보에 들른 후 이번에도 어김없이 월악산을 찾았습니다. ‘하늘재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백두대간의 남한 쪽 허리지점에 위치한 월악산은 영남과 충청를 가르는 분깃점이기도 합니다. 이 월악산에 자리잡은 채 충주 중원쪽에 위치한 미륵리와 영남 문경쪽의 관음리를 잇는 고갯길이 바로 하늘재입니다.
‘미륵리, 관음리, 하늘재’
현대에 들어 더 이상 교통로의 기능을 이어가지 못하는 하늘재의 일생도 어느덧 마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옛길에서 느껴지는 한적함의 정취가 한번 찾은 세인들을 또다시 끌어들이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개발의 바람이 확산될수록 옛 정취가 묻어나는 정겨운 시절이 그리운 것은, 에덴동산에 대한 동경만큼이나 우리내면에 깊숙이 자리잡은 원초적 향수인것 같습니다.
겨울이 가는 길목에서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여기저기 쌓여있는 잔설들이 하늘재에 얽힌 추억을 함께 나누자며 유혹합니다. 숲속 언덕바지를 오르내리던 흑염소 무리들이 낯선 이방인들을 구경하려는 듯 자신들의 놀이를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다 봅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백두대간 안쪽 영남지역에 갇혀있던 신라가 새롭게 웅비의 나래를 펼치며 이곳의 길을 열었을 때 그들의 목표는 한반도 중앙 진출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백제 고구려와 한판 승부를 예고 하였는 바, 그 후의 피비린내 나는 삼국항쟁의 기록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신라에 빼앗긴 한강일대를 되찾고자 고구려군을 이끌고 충주 단양일대를 누비다 전사한 온달장군의 한서린 모습도 눈에 그려집니다.
신라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집요하게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후고구려 궁예왕의 부릅뜬 눈도 보이는 듯 합니다. 경주까지 쳐들어가 황룡사를 불태운 몽고군이 하늘재를 넘는 말발굽 소리가 귓가를 울립니다. 홍건적에게 도성을 내주고 안동 피난길에 이곳을 넘으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고려 공민왕의 흐느낌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곳 하늘재 길에 오를 때 그 누구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천년왕조 신라를 마감하며 비운의 눈물을 흩뿌리고 갔을 마의태자의 모습입니다. 고려에 나라를 송두리째 바치기로 결심한 아버지 경순왕의 결정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그였습니다. 그가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 거쳐간 경로로 추정되는 곳이 바로 하늘재 고갯마루입니다. 이곳 미륵사지에는 그에 대한 전설이 서려있고 미륵사 석불은 마의태자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승되어 내려옵니다. 오늘도 하늘재 가는 길은 나그네를 묵묵히 맞아줍니다. 그 위를 걸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품에 안으며 그들의 애환을 달래주었을 하늘재 길바닥에 잠시 허리를 구부리고 살며시 귀를 가져다 대보았습니다. 구비 구비 이어지는 오솔길 사이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
'기고,나눔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의 태자의 한과 꿈, 미륵리 석불앞에서 (0) | 2007.03.13 |
---|---|
자신과 연애하듯 삶을 살아라 (0) | 2007.02.23 |
방파제에 올라 만파식적을 그리다 -감포 가는 길(4)- (0) | 2007.02.02 |
기림사에서 -감포가는 길(3)- (0) | 2007.01.25 |
빈 의자 앞에서 -감포 가는 길(2)- (0) | 2007.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