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엔 전등사만 있는게 아니다 | |||||||||||||||||||||||||||||||||||||||
-삼랑산성, 단군의 기억을 찾아서(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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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에 오르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삼랑산성, 혹은 정족산성이라 불리는 성채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동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있는데 비해 현대에 들어 누각이 복원된 남문은 ‘종해루’라 호칭하였습니다. 화려한 단청의 누각이 제법 품위를 자랑하는 남문에 비해 동문은 고즈넉한 고성의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국사교과서에는 병인양요의 전적지를 설명하면서 ‘정족산성’이라 명기되어 있으니 이곳의 정식명칭은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등사에 올 때 마다 느끼는 이곳의 풍경은 ‘삼랑산성’이 사람들의 입에 더 선호되는 듯한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공식명칭과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이름이 혼용되어 쓰이는 사례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에밀레 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일 것입니다. 또한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 ‘무영탑’이라 불린 불국사 석가탑도 그러한 경우중 하나일 것입니다. 공식명칭이 격식을 강조하는 느낌을 준다면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비공식 명칭은 서민들의 애환이 설화나 전설로 채색되어 상상력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친숙함도 더 느껴집니다. 아이를 끓는 쇳물에 집어넣었다는 에밀레종이나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연못에 빠져죽은 아사녀의 슬픔이 깃든 무영탑의 이야기엔 민중의 한이 담겨있습니다. 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대규모 조형물들을 조성하였던 그 당시에 가정마저 파괴된 채 권력앞에 무릎을 조아려야 했던 민초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것입니다.
반면 단군과 그의 세아들의 이름이 어려있는 삼랑산성이라는 이름은 호국의 기상이 서린 강화도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강화도 자체가 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거대한 전당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곳이지만 전등사에 가는길에 마주치는 ‘삼랑산성’의 성벽들은 어느것 하나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성의 축성법이 삼국시대 석성축조법의 양식으로 파악되어 역사적 고증연대가 그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하지만 굳이 단군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강화도 일대에 널려있는 고인돌로 미루어보건대 삼랑산성은 그 이전부터 군사 정치적 요충지로 주목받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싸움전날 자신의 이름을 기둥에 새겨 넣으며 단군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단군과 그의 세 아드님이 직접 쌓은 이 산성을 감히 누가 무너뜨릴 수 있겠냐는 믿음으로 자신을 위안하며 불안감을 달랬을지도 모릅니다. ‘너희들도 그때 밤을 지새며 두려움에 떨었니?’ 그 당시의 격전을 직접 지켜보았을 길가의 노송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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