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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그날의 함성을 찾아서 -김포뉴스 펌

김포대두 정왕룡 2007. 4. 7. 20:26
병인양요, 그날의 함성을 찾아서
전등사엔 전등사만 있는게 아니다(2)
2007년 04월 02일 (월) 15:56:11 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삼랑산성 동문을 지나 전등사로 오르다 보면 반드시 마주치는 비석이 있으니 바로 양헌수 승전비입니다. 병인양요 당시 이곳 삼랑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일을 기념하여 세워진 비석입니다.

   
   
지방유형 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되어 있는 비석은 그 뒷면에 병인양요 당시의 전투기록이 새겨져 있다하나 비각안에 자리잡고 있어 제대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프랑스군은 천주교도를 탄압한 병인박해를 응징한다는 구실로 1866년 강화도에 쳐들어 옵니다. 병인박해당시 수천명에 달하는 천주교 희생자 중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당시 북경에 주둔중이던 프랑스 함대에 알려지면서 로즈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강화도로 출정하였습니다.  

 

 

 

 

 

 

 

   
 
   
1차 출병때 한강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와서 수로 측량까지 마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강화도를 공략한 2차 출병 때 이들은 손쉽게 섬을 점령합니다. 내친김에 김포반도 문수산성에 상륙하여 조선군의 기세를 제압하기도 하였습니다. 강화도마저 내준데다 문수산성 전투에서 변변이 대응하지 못한 조정에서는 급히 순무영이라는 부대를 편성, 통진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강화도 탈환전략에 고심하게 됩니다.

 

제주 목사로 있다가 순무영 부대의 부장격인 천총에 발탁된 양헌수는 프랑스 군대의 막강한 화력앞에서 정면승부로는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 치밀한 작전계획 수립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군의 감시를 피해 김포의 덕포진쪽에서 한밤중에 손돌목을 도하하여 삼랑산성으로 들어가 진을 친 것입니다. 정족산성이라 불리기도 하는 삼랑산성에서 양헌수는 선제공격 보다 프랑스군의 진공을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방어에 유리한 삼랑산의 지형적 특징과 단군의 전설이 서려있는 호국정신의 분위기가 병사들의 사기진작및 작전수행에 유리하다고 판단한듯 했습니다.

 

반면에 초반전 압도적 승리에 도취된 프랑스군은 야포도 동원하지 않은 경무장 보병으로 반나절만에 삼랑산성을 제압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프랑스군의 방심을 꿰뚫어 본 양헌수 부대는 동문과 남문 중심으로 진을 치고 일부는 근처 야산의 소나무숲에 매복하여 집중 공격을 하였습니다.

전투결과는 프랑스측에선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 뿐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철수를 단행하였으나 강화부 점령때 약탈하였던 외규장각 문서와 은괴상자등을 고스란이 가져가 지금까지 외교적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비록 외규장각 문서는 약탈당하였지만 정족산성에서의 전투는 조선왕조실록등이 보관되어 있던 정족산 사고를 지켰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강화부 점령시 외규장각 문서를 가져갈 정도로 문화재 약탈에 혈안이 되었던 저들에게 조선왕조 실록마저 빼앗겼을 상황을 가정한다면 아찔하기만 합니다. 관군외에 지방에서 차출된 포수들, 그리고 전등사내외의 승려및 민간인까지 합세하여 거둔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는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서 거둔 최초의 전승이라는 의미도 무시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러한 승리에 도취되어 제국주의 세력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사후대비를 소홀히 한 면입니다. 연이어 발생한 신미양요때도 병사들은 분전하여 싸웠지만 대원군을 비롯한 국가 위정자들은 국가위기를 헤쳐나갈 근본적 대안인 ‘근대 조선’의 건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안일무사는 병인양요로부터 10년 후인 병자년(1876년)에 일본제국주의 함대 운요호가 강화도를 침략했을 때, 변변이 대응을 못하고, 불평등 내용 일색인 ‘강화도 조약’에 도장을 찍게 만듭니다.

 

정족산성 전투는 세계 최강의 서구제국주의에 맞서 열악한 무기로 승리를 거둔 빛나는 전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한두번 전투에서 승리하는게 전부가 아님을 일제 식민의 역사는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투의 승리에 도취되기보다 실패의 교훈을 반성하는 쪽이 역사의 승자가 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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