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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세종을 만났을 때-박 현 모

김포대두 정왕룡 2007. 6. 16. 20:11

정조가 세종을 만났을 때


박 현 모(한국학중앙연구원)


1779년 8월 3일 새벽 정조는 창덕궁을 나섰다. 영릉(寧陵), 즉 효종능을 찾아 서거 120주년을 기린다는 것이 행행(行幸)의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즉위 초년의 정조에게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같은 여주에 있는 또 다른 영릉(英陵)인 세종의 능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도성에서 200여리나 떨어져 있는 그곳까지 행차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무엇보다 강물넓이가 3백 발(150미터) 가량의 한강을 건널 때가 위험했다. 더군다나 그 간 국왕의 경호와 국사를 도맡아 온 홍국영이 불과 석 달 전에 도승지를 그만 둔 상황이 아닌가.


1779년, 정조가 영릉에 행차한 까닭은?


거가(車駕)가 흥인지문을 통과해 세종 때 지은 화양정을 지날 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나루에 도착하자 비가 그치고 강 너머에서 동이 터 올랐다. 영의정 김상철이 “잠깐 비가 내리다가 개어서 군병이 모두 젖는 것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길에 먼지가 없다”면서 기뻐했다. 하지만 정작 큰일은 탈 없이 한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병조판서의 지휘에 맞춰 발사되는 승선포(陞船砲) 소리를 들으면서 정조는 용주(龍舟: 왕이 타는 배)에 올랐다. 거가 앞 호위를 담당하는 장사(將士) 등이 용주의 왼편 예선(曳船: 다른 배를 끄는 배) 밖에서, 그리고 거가 뒤의 장사와 경기영의 기고(旗鼓)는 오른편 예선 밖에서 호위하며 배를 저어 나갔다. 강심을 지날 때 배가 약간 흔들리긴 했지만 무사히 강의 남쪽에 도착했다.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리는 행선포(行船砲) 소리가 울리자, 불꽃이 솟아오르고 대취타(大吹打)가 울렸다. 각 군영에서는 때를 맞춰 축포를 쏘았다.


길가에 빼꼭히 늘어선 백성들을 보고 정조가 말했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이 백성들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하겠다.” 아울러 정조는 숙종의 주수도(舟水圖)에 대해 언급했다. 즉 1675년에 숙종이 “임금은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연후에 배가 안정되고, 신하가 어진 이후에 임금이 편안하다”며 물과 배 그림을 그리게 했던 일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숙종이 물을 신하로 비유해 ‘보필의 논리’를 도출하는 데 비해, 정조는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을 수도 있다”고 하여 국왕의 ‘삼가는 자세’를 말한 점이다. 두 임금의 상이한 정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라 하겠다.


정조, 불안한 정치적 환경 속에 세종을 본받고자


다음날(8월 4일) 거가가 남한산성을 출발해 경기도 이천지역에 이르렀을 때는 관광(觀光) 민인이 “산에 가득차고 들에 두루 찼다.” 이천 서현(西峴)을 지날 때는 한 늙은 백성이 수박 한 소반을 받들어 임금에게 바치기도 했다. 사흘 째 되던 날(8월 5일), 드디어 효종 능에 참배하고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곧 세종 능을 찾았다.


정조는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 예악문물은 모두가 세종 때 만들어졌다. 그 큰 규모와 아름다운 법[宏規懿法]을 이제까지 준수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즉위하자마자 집현전을 본 따 규장각을 세웠고, 세종이 갑인자(甲寅字)를 개발해 문화정치를 주도한 것처럼 자신도 재위1년에 정유자(丁酉字)를 개발케 했다. 신분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했던 세종처럼 정조 역시 규장각에 서얼출신 사검서를 발탁했다. 무엇보다 신민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이 국정의 출발점이며 정치의 궁극 목적은 바로 백성을 편안케[便民] 하는데 있다는 점을 세종에게서 배웠다. 한마디로 세종은 정조의 ‘준거 군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와 세종이 처한 정치적 환경은 달랐다. 부왕 태종에 의해 공신과 외척 등 개혁의 장애물들이 제거된 세종과 달리, 정조의 경우 할머니와 어머니의 외척들이 막강했다. 김귀주와 홍인한으로 대표되는 두 외척 세력은 정조의 왕위계승 자체를 반대했었다. 게다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자체가 정조에게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두 임금의 즉위 제일성은 두 사람의 정치적 기반의 차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세종은 즉위한 지 3일 만에 도승지 하연에게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면서 ‘의논’을 맨 처음 말했다. 이에 비해 정조의 첫마디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이었다. 정조의 이 말은 실로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그것은 생부 사도세자를 죽였고 자신의 등극을 반대한 정적들에게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사도세자에게는 왕이 아닌 “대부로서 제사하는 예법”이 행해질 것이라고 말해 영조의 뜻(“사도세자 문제를 거론치 말라”)을 저버리지 않을 것임도 분명히 했다. ‘정치보복’을 두려워하는 정적들의 불안감을 다독거린 것이다.


왕위에 오른 정조가 해야 할 일은 그 뿐이 아니었다. 자신의 은인이자 결정적인 즉위공신인 홍국영의 세도(勢道)를 잡음 없이 제거하는 일이며, 사망한 지 9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송시열의 그늘을 걷어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효종이 걸었던 길을 밟아서는 안 되었다. 형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은 송시열 등의 북벌론에 고무되어 군비를 증강했다. 하지만 강한 신권과 정파의 대립 속에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못한 채 그는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레 승하하고 말았다. 그와 달리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정적들까지 포용하면서, 민생개혁에 모든 힘이 집약되도록 만들었다.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신하의 이질적인 생각과 붕당간의 경쟁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어전회의라는 용광로에 녹여내는 것, 바로 거기에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 있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정조가 세종을 만났던 바로 그곳 여주에서 탕평정치의 꿈이 탄생했다.

 


글쓴이 / 박현모

·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 저서 :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푸른역사, 2007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1

          『세종의 수성(守成)리더십』, 삼성경제연구소, 2006 등

· 역서 : 『몸의 정치』, 민음사, 1999

          『휴머니즘과 폭력』, 문학과 지성사, 2004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