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및 논평

윤석열의 현장은 어디인가? – 명·문칼럼 (3)

김포대두 정왕룡 2022. 9. 10. 09:10

* 윤석열의 현장은 어디인가? – 명·문칼럼 (3)

 

현장은 정치인을 잉태하는 자궁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기에 현장은 정치인의 모태이자 근본이 되는 곳이다.

정치인이 현장에서 멀어지면 그는 장막에 갇히게 된다. 

그것이 ‘사람의 장막’이든 ‘이권의 장막’이든 한번 멀어지는 순간 다시 생명의 불씨를 지피는게 여간 쉽지않다.

 

정치인과 현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에게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당신의 현장은 어디고 지금 당신은 그 현장에 있느냐”고

 

그래서 국민은 윤석열에게 묻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의 현장은 어디고 

지금 당신은 그 현장에 서 있느냐“고

 

하지만 윤석열의 현장은 ‘서초동 장막’과 ‘부인 장막’에 여전히 갇혀있는 느낌이다. 그 주변에 검사들을 주욱 줄 세우고 말이다. 주변애는 무속인들의 그림자까지 어른거린다. 

 

그에게 반지하방이나 포항 아파트 주차장 참사현장은 잠시 잠깐의 나들이 코스인 것은 아닌지 국민은 의심하고 있다.

 

현장은 현장의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바지 옷차림이나 다크서클’ 운운하는 기사로 도배질하거나 반지하방을 기웃거리는 이미지는 금방 의도를 들켜버리는 세상이다. 얼마전 바뀌었다는 초록색 재난근무복을 입고 재난 상황실에서 개인 휴대폰으로 공적업무를 지시하는 사진을 봤다. 그런데 그 이미지 사진은 과연 국민이 안전을 믿고 맡길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한다. 

 

부활절도 아닌데 부활절에 늘상 불러지는 찬송가 구절이 갑자기 떠오른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기독교인이라면 모를리 없는 부활절 때 가장 많이 불려지는 찬송가 가사다. 십자가에 달리는 대상을 ‘국민’으로 바꾸어 보았을 때 그리고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을 정치인으로 바꾸어보면 ‘정치’라는 두 글자는 목숨을 걸어야 할 영역임이 느껴지며 소름이 돋는다.

 

그런 자세로 김대중 노무현이 목숨을 걸었고 문재인은 노무현의 유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윤석열에게 이러한 자세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막을 푸른 옥토로 바꾸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와서 그에게 투표한 손가락을 어떻게 하고 싶다고 말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우리는 끊임없이 그에게 물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윤석열 당신의 현장은 어디냐’고

 

* 이번 재난으로 숨진 포항 중학생과 주민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