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및 논평

잊을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이름 앞에서........

김포대두 정왕룡 2007. 3. 26. 00:04
 

잊을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이름 앞에서........


3월 22일 목요일 저녁, 모처럼 안국동에 나갔습니다.

안국역에 내려 약속장소 음식점인 ‘백두산’에 도착하니 이미 몇몇 분들이 와계셨습니다.


참여연대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지금은 희망제작소로 옮겨 간사로 활동하고 있는 안진걸 후배가 밝은 표정으로 맞아주었습니다.  낯익은 후배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얼굴이 낯선 친구들이었습니다.


‘아, 저분이 이내창형 큰 형님? 저렇게 늙으시다니!’

그중에 머리가 희끗하신 어르신을 뵙고 인사를 드리면서 18년 전의 기억이 스쳐지나갔습니다.


89년 8월, 전남 여수에서 들려 온 소식, 당시 중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님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거문도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거문도행 선박에 안기부 요원이 동승했다는 주변목격자들의 증언은 임수경의 방북등대학가를 당시 뜨겁게 달구었던 통일투쟁과 맞물리면서 정국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습니다.


군제대후 복학한 뒤 늘상 예비역들이 그러는 것처럼 도서관을 안방삼아 책과 씨름하던 제가

87년 6월 항쟁의 물결에 휩쓸려 거리를 내달리다 내친김에 88년에 단과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임기가 끝난 뒤 공부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한발을 더 내딛을 만한 용기가 없었기에) 휴학을 한 뒤 다시 책과 씨름하던 차에 들려 온 이내창형의 죽음은 소박한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나에게 박종철의 죽음에 이은 또하나의 충격이었습니다. 비록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다 하더라도 이내창 형이 나와같은 복학생 신분으로 자기결단의 길을 갔던 데 비해 도서관으로 향했던 나의 행동이 두고 두고 부채의식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진상규명 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결국 사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광주 망월동에 내창형의 시신을 묻고 돌아올 때 울분에 복받쳐 입술을 깨물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해 연말 공부에 대한 미련을 접고 총학선거에 출마하면서 결국 오늘 여기까지 와 버렸습니다.


지난 구정연휴기간에 들려온 이내창형 어머님의 별세소식에 찾아뵙지 못한 죄송스러움이 있던 차에, 유족을 대표하여 큰 형님과 동문들이 조촐한 식사자리를 마련했다며 꼭 오라는 안진걸 후배의 전화는 나의 발걸음을 안국동으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내창이 장례식을 치른 후 두해 지나서 쓰러지신 뒤 15년간 병석에 누워계시다 운명하셨어요”

큰형님이 어머님의 이야기를 전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장례식을 치른후 남몰래 두 번이나 여수 바닷가에 내려가 눈물을 적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막내자식을 권력의 폭압으로 떠나보낸 후 그 아픔을 삭이지 못하고  쓰러지신 후 이제 하늘나라로 아들을 만나러 가신 어머님의 영전에 뒤늦게 나마 조의를 표합니다.


“너도 나도 ‘화해’를 이야기하는게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데 지금이 ‘화해’를 이야기 할때인가. 적어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고 가해자들이 유족과 국민앞에 용서를 구하고 사죄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는 ‘화해’ 운운은 사치이자 죄악이다”


인혁당 사건 유족들이 사람들에게 전해달라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쏟아냈다는 말을 전해듣는 순간, 아직도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재자의 딸이 유력한 대선후보로 두각을 나타내고 학살자의 호를 딴 공원이름이 버젓이 지방자치 단체에 의해 추진되는 현실, 면도칼 바람하나로 지자체 선거가 싹쓸이 되는 상황은 아직도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많음을 일깨워줍니다.


80년대 이후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변모과정을 거치면서 각자 나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시민운동가, 대기업 회사원, 소규모 자영업자, 신문·방송 기자, 총리실 비서관, 의원 보좌관, 대학생, 학원운영, 기초의원..............’


그날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떠오릅니다. 예전 같으면 시국현안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주고 받았을 성 싶은 모임인데 이제는 서로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해주고 무거운 이야기는 뒤로 미루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타협한 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진걸이가 방송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한 후배를 소개하면서  덧붙인 멘트에 좌중에 한바탕 웃음이 일어납니다.


얼마전에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진상규명 운동’과 유족돕기 모금에 백오십만원이 넘게 모였다는 보고에 좌중의 분위기가 숙연해집니다.


평일 한복판 다들 바쁜 일정들이 있었을텐데도 이 사람들을 안국동에 모이게 한 요인이 뭐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 부끄러움’이 아직도 우리네 가슴을 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잊을 수 없는 , 잊어서는 안되는 수많은 열사의 이름들을 가슴에 담은 채 사회 한구석에서 삶과 씨름하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서 부채의식이 사라지고 한줄기 밝은 햇살이 퍼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보았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현재 진행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