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꿈 함께 만들어요.'
-초등학교 사회과 시범수업 강사초빙을 받다-
"아버님, 올 가을에 사회과 시범수업을 할려고 하는데 시간 좀 내어 주세요"
두달 전에 딸아이 담임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불러주시면 영광'이라며 기꺼이 시간을 내겠다고 대답했다. 원래 남 앞에 서는 것을 제안 받았을 때 꺼려본 적이 별로 없던터라 '준비하면 되겠지'하며 여유있게 생각했다.
10일전에 시간확정을 위한 전화를 다시 받았을 때에도 '거뜬히 할 수 있으니 염려 안해도 돼!'라고 당당하게 딸아이 앞에서 말했다. 하지만 카운트다운 5일을 넘어서면서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시의원의 역할'에 대해 학생들이 알기쉽게 이야기 해달라는데 도대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방향이 안잡혔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방자치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시의원의 역할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 생각할수록 막막하기만 했다.
"아빠, 시험 보기전 나에게 자주 하는 말 있잖아. 그냥 맘편하게 차분하게 하면 되잖아."
아빠가 고민하는 모습이 걱정되어 보였는지 딸아이가 격려랍시고 던져준 말이 오히려 뒤통수를 콕 찌른다. 언행일치의 본을 보이지 못하는 아빠의 행동에 대한 따끔한 일침으로 들린다. 하긴 저도 친구들과 함께 아빠의 강의를 듣는터라 신경이 안쓰일 리가 없을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게 다행이다. 그보다 저학년이었으면 진짜 대책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강의임박 하루 전, 이번에도 역시 닥쳐서야 정신이 번쩍 트이고 머리가 돌아가는 '마감효과'가 나타났다. 우선 서두에 학생들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을 하기로 했다. 장래 꿈, 좋아하는 색깔, 시의원이 하는 일등에 대해 각각 한가지씩 주관식으로 쓰는 설문이었다. 그리고 당일 새벽에 일어나 학생들에게 현장에서 낭송할 편지를 써내려갔다. 2시간 가까이 써내려간 편지를 완성하고 나니 새벽 5시를 넘겼다.
다음으로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동영상 폴더를 훑어보았다. 특히 석달 전부터 시작해서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하였던 '주간 영상편지함'을 살펴보았다. 일주일 단위로 의정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동영상을 편집한 다음 자막과 음악을 군데 군데 섞어서 그 다음주 초 블로그에 올렸던 주간영상 편지가 어느새 10편이 되었다. 그중 8회와 10회를 골랐다. 8회는 아이 방학숙제를 함께 해준다며 지역명소를 둘러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기초의원 업무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데다 가족이 노출되는 부담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체로 학생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 같아 골라보았다. 가장 최근 것인 10회는 얼마 전에 발의하여 통과된 '학교급식 조례안 ' 내용이 중심이었다. 학생들에게 직접 관련이 있는데다 기초의회의 주요기능인 조례제정 과정이 담겨있어 안성맞춤이었다.
"아빠, 그런데 내 옷은 어디에 쓸려고 그러는 거야?"
"일급비밀이라 말해줄 수 없어."
아이의 양해를 얻어 '보라색 티'를 소품으로 준비하였다. 자기한테도 비밀을 유지하려는 아빠의 모습이 서운하면서도 궁금하다는 모습이다.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했던가? 강의 당일 오후 1시로 예정되어 있는 행사준비 할 틈도 없이 오전 의회 일정이 바쁘기만 하다. 점심을 겸한 의정 자문회 간담회에 참석인사를 하자마자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결례를 범하면서 학교로 바삐 향했다.
"아이구, 이걸 어쩐담?"
딸아이 학급만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줄 알았는데 안내하는 곳이 교실이 아니라 시청각실이다. 백오십명 가량의 6학년 학생전체가 모여있다. 설문 용지 추가준비를 급히 부탁드리고 학생들 앞에 섰는데 교장선생님이 과분한 소개를 해주신다. '김포시 의회 정왕룡 의원 초청수업'이라는 현수막도 무대위에 걸렸다. 그런데 새벽에 썼던 편지를 프린트 하는 것을 깜박했다. 설상가상 내 노트북이 빔 프로젝트와 연결이 잘 안되나 보다. 준비하시는 선생님이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다른 노트북을 가져온 뒤 급히 파일을 복사한다. 편지는 그냥 노트북에 있는 그대로 읽기로 했다.
일단 마이크를 잡고 강의를 시작하였다. 설문지용 백지를 돌렸다. 장래 꿈과 좋아하는 색깔, 시의원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무기명으로 써내라고 했다. 저마다 준비해온 연필로 끄적거리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친구들 사이에 끼여 중간 왼편쯤 앉아있는 딸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수줍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한 표정이다.
'아나운서, 노랑색, 김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공무원, 빨강, 나라를 위해 힘쓴다.'
'네일 아티스트, 검정, 시민의 걱정을 들어준다.'
수거한 설문지를 즉석에서 읽어내려가는데 시의원의 역할에 대해 '몰라요' '알수없음'이라는 말들이 눈에 자주띤다. 그대로 읽어주었더니 재밌는지 아이들 사이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드디어 동영상 세팅이 완료되었다는 신호가 왔다.
"여러분, 제 머리가 커보이죠? 제 별명이 김포대둡니다. '다음'에 제 블로그 이름도 여기에서 따왔습니다. 지금 보시는 동영상은 제가 일주일 단위로 활동하면서 블로그에 직접 찍은 내용을 올려놓은 것 중 일부입니다. 여러분들이 써낸 시의원의 역할과 동영상의 내용이 얼마나 연결되는지 직접 확인해보세요. "
그리고 첫 번째 동영상을 틀어줬다. 중간 중간 마이크로 해설도 곁들였다. 각종 모임과 행사, 시의회 중학생들 모의 의회, 그리고 아이와 함께 김포지역 명소탐방 장면도 나왔다.
"와아! 노래방이다!"
아이들 속에서 갑자기 함성이 터진다. 의회 사무과 직원 환송회당시 노래방에서 얼굴 시뻘개지며 한곡조 뽑았던 사진이 적나라하게 비쳐지는 장면이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모은 것 같았다.
"여러분 , 화면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
"모임이나 행사 참여요, 토론회요. 주민 만남요........"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한마디 하는데 "노래방 가는 거요."라는 소리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두 번째 동영상을 틀어줬다. 학교급식 조례안 통과장면이 주된 내용이다. 준비모임 과정, 공청회, 의회상정, 제안설명, 본회의 통과장면등이 나올 때 군데 군데 설명을 곁들였다. 광우병 관련 멘트도 살짝 곁들였다. 여러분들이 먹을 학교급식이 그래도 한층 안전해졌다며 '조례'가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도 했다. 다문화 축제 그림도 지나갔다. 장애인 축제장면이 나오기전 '연예인'이 등장한다니까 "야! 빅뱅 나오나보다" 라는 소리가 들린다. '초청가수 장윤정'의 모습이 비치니까 여기저기서 '에이!'한다. 확실히 세대차이가 난다. 그 와중에서도 놓치지 않고 '지역축제에 유명연예인이 오는 것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장애인 행사면 장애인 출신 연예인을 초빙'하는게 가장 좋았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두 번째 동영상이 끝났다. 이번에는 보다 더 구체적인 반응들이 나온다.
권력의 균형과 견제 이야기도 했다. '참정권'이란 말을 아느냐고 했더니 얼마 전 수업시간에 배웠단다. 내친 김에 '헌법 1조'도 학생들과 같이 암송해봤다. '민주'라는 말을 되뇌이며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고 시의원은 거기에 고용된 일꾼이라고 했다. '여러분들에게 잘못 보이면 나같은 사람은 다음 선거에서 짤릴 수 밖에 없다'며 목에 칼손을 하고 쓱싹하는 표정을 했더니 표정들이 진지해진다.
"여러분, 제가 옷 갈아입은 거 보이세요? 무슨 색이죠?"
"보라색요."
"네, 맞아요. 사실 이옷은 제 옷이 아니라 딸아이 옷입니다. 오늘 빌려입고 나온거죠. 아까 여러분들 설문지에 좋아하는 색깔을 쓰라고 했죠? 하필이면 색깔을 왜 쓸까?라고 궁금해한 친구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자 이 대목에서 제가 새벽에 잠안자고 일어나 쓴 편지를 여러분에게 낭독해드릴까 합니다. 거기에 보라색 옷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제 편지를 읽으면서 오늘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분위기를 '엄숙모드'로 잡아놓고 편지를 읽어내려가는데 아이구 이런! 복도에서 쉬는시간을 알리는 차임벨이 들린다. 갑자기 아이들이 들썩인다.
"여러분, 배경음악이 없어서 편지낭송이 허전했는데 이렇게 협조가 이뤄지네요."
나도 모르게 한 순발력하는 멘트가 나오면서 다시 분위기가 정돈된다.
<......양도초 학생 여러분. 이 대목에서 저는 오늘 제가 세 번째로 마련한 준비물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자 보세요. 제가 지금 갈아입은 옷 보이죠? 저는 오늘 여기에 오면서 여러분의 친구, 누리의 옷을 갖고 왔습니다. 누리의 여러 옷 중 이것을 갖고 와서 제가 입은 이유는 바로 이 보라색 색깔 때문입니다. 저는 보라색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작성한 설문내용을 보니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색깔은 참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등 원색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원색을 좋아하나요? 화려해서입니까? 아니면 눈에 잘 띠어서입니까?
원색은 발산하는 색깔입니다. 뿜어내는 색깔입니다. 뽐내는 색깔입니다. 튀는 색깔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라오면서 부모님의 보호아래 꿈을 만들고 뿜어내고 화려하게 꾸미는데 익숙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지금,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꿈을 만들면서 자신의 색깔을 찾아나서야 하는 때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보라색에 담긴 상징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보라색은 다양한 색깔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특히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빨강과 파랑을 함께 어우르는 색깔입니다. 보랏빛은 껴안는 색깔입니다. 내세우는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색깔입니다. 편을 가르는 색깔이 아니라 함께 손을 잡게하는 소통과 어우러짐의 색깔입니다. 화려함도 없습니다. 눈에 잘 띠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파랑이든 빨강이든 어떤 색깔에도 손을 내밉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보랏빛 꿈을 키우길 권합니다. 보랏빛 지혜를 갖길 원합니다. 친구들과 가족과 주변과 이웃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음짓는 보랏빛의 넉넉함을 소유하길 부탁합니다.
아까 여러분들이 써주었던 꿈이 담긴 종이들을 함께 모아 저는 지금 보랏빛 스웨터안 제 가슴속에 집어넣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따뜻한 손길과 체취가 제 가슴 하나가득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는 제가 여러분들을 가르치러 온게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한아름 선물을 받고 돌아가는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
편지낭송이 끝났다 싶었는데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진다. 안도감이 밀려온다. 끝났다는 생각에 등 뒤로 땀이 흐른다. 쉬는시간 종소리까지 얼추 계산해보니 50분 정도 시간이 지난것 같다. 잘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선방했다'는 느낌은 들었다. 주변에서 같이 준비해주신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악수를 청했는데 표정들이 밝으시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정말, 누리 옷 맞아요? "
어느새 딸아이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보라색 티를 만져보며 궁금증을 확인하려든다. 딸아이가 수줍은 표정으로 나대신 친구들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정의원님, 아이들 소감문을 받아보았는데 내용들을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이렇게 좋은 반응이 나올줄은 몰랐습니다. 다음에도 부탁드리면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다음날 교장선생님이 수화기 저 편에서 하시는 말씀에 뿌듯한 보람이 느껴졌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꿈나무들과 소통에 어느정도 성공했다는 안도감이 밀려든다. 하지만 다시 또 하라고 하면 이번에는 자신있게 대답이 안나올 것 같다. 시의원이란거 하면 할수록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 하루였다. 이 자리를 빌어 동영상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고 개인지도를 아끼지 않은 선생역할을 해준 누리와 현장에 동행하여 사진사 역할을 다해 준 아이 엄마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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