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72 김포군 ! -김포의 길을 묻다(15)
'어서 오십시오. 김포군 고촌면 풍곡리 풍곡 불정동'
'고향사랑 부모효도 1972년 3월 9일 세움'
48국도를 따라 천등고개를 넘어서다 보면 금란초가 있는 장곡마을로 향하는 도로가 나온다. 거기에서 다시 낮은 언덕고개를 넘어 오른쪽으로 뻗은 도로가 보이는데 향산리로 가는 길이다. 한적한 시골길 답지않게 차도와 인도가 공원을 향하는 길처럼 잘 정비되어 있다. 그 고개를 넘다보면 오른편에 차 한대 지나갈 정도의 길이 나온다. 그 길목에 서있는 마을이 풍곡 불정동이다. 마을 입구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표지석이 서있다. 보통 아파트 단지 입구등에 세워지는 표지석과는 달리 인공적 손길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다.
'김포군 고촌면'
아마 72년도에는 그리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김포시 고촌읍이다.
'고향'이란 두 글자가 눈을 아프게 한다. 어릴적 일찍 떠나와 달동네를 전전하며 서울을 비롯, 수도권 지역 곳곳을 수십번 이사 다니며 청춘기를 보낸 기억때문이다. 고향사랑과 부모효도를 나란히 새겨넣은 의미가 무엇일지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고향=부모, 사랑=효도>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1972년으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국민학교 2학년때였다. 서해안 염전이 드넓게 펼쳐져 있던 부안평야에서 신작로 길을 따라 십리길 학교길을 오갔었다. 책가방 대신 보자기를 어깨에 대각선으로 걸머매고 달그락 거리는 젓가락 소리를 벗삼아 보리피리 불며 오가는 길이었다. 용천백이가 나타났다고 기겁을 하며 집으로 달음박질 치던 일도 생각난다. 눈쌓인 벌판에 큰대자로 드러누워 자국난 형체를 보고 누가 더 잘나왔냐며 사진찍기 경쟁하던 일도 있었다.
김포의 72년 풍경은 어땠을까?
아마도 나의 어릴적 고향 풍경과 크게 다른 모습이 있었을까 싶다.
40년도 넘은 옛적에 이정도 규모의 마을 표지석을 세울 정도였으면 아마도 불정동 마을은 제법 활력이 넘치는 곳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지금이야 뜸뜸이 오가는 사람들, 그것도 나처럼 두발로 걸어다니는 길손들, 그중에서도 한가하게 주변을 살피는 사람의 눈에만 들어오는 모습이었지만, 세워졌을 당시에는 제법 위용을 자랑했을듯 싶다. 아마도 이 표지석이 세워질 당시에는 마을잔치도 크게 열지 않았을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이나 그 앞에서 온갖 상상에 잠기는 사이 벌써 주변에 그늘이 짙어진다.
향산리를 갈려면 아직 거리가 꽤 남았다. '고향'이란 두 글자에 붙들려 떨어지지 않는 발에 힘을주어 한강변 향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겨본다. 하늘위로 저녁 잠자리를 준비하러 가는 기러기들이 떼지어 날아간다. 제법 요란한 울음소리를 낸다. 마치 그 소리가 '밤이 다가오는데 왜 그쪽으로 가냐'며 걱정해주는 목소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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