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나눔글

해마다 8월이 오면 ! -이내창 추모 글

김포대두 정왕룡 2014. 6. 26. 10:46

해마다 8월이 오면 !!


8월이 다가온다. 어릴적 8월은 광복절이 있는 달로 기억되었다. 또한 방학이 막바지로 치닫는 시점으로 밀린 방학일기 몰아서 쓰느라 바쁜 가운데서도 개울가에서 물장구치고 멱을 감고 원두막 그늘아래서 참외를 먹었던 추억이 쌓이는 달이었다.


그런데 1989년 8월을 지나면서 마주친 이내창이라는 이름은 어릴적 이런 기억들을 지워버린 채 평생 잊혀질 수 없는 아픔으로 대체되어 지금도 내 가슴을 찌르고 있다. 8월 15일 이후로 여수 거문도에서 용산병원, 흑석동 교정, 안성교정, 광주진입로 대치상황, 망월동 묘역...그리고 안기부 응징투쟁, 90년 이철규 이내창 영혼 의형제 결연식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숱한 기억의 족적들이 ‘그대 못다한 젊음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라는 처절한 구호와 함께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내창이형과 나는 개인적 친분도 교류도 없는 사이다. 88년 문리대 학생회장을 그만둔 뒤 89년에 흑석동 교정 농활대장을 하면서 양 캠퍼스 등록금 투쟁 연합집회 등을 통해 먼 발치에서 지켜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나의 삶을 바꿔놓아 버렸다. 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도서관에서 공부에 열중하고자 했던 나를 대책위 활동과 함께 다시 투쟁의 전선으로 몰아넣은 계기를 제공했고 그 이듬해 총학선거에 출마하게 된 동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학교 졸업 후 결혼도 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어느날 의문사 진상규명위에서 연락이 와서 국가인권위 사무실을 방문하여 여러시간 동안 대책위 활동을 증언했던 기억도 난다. 정권교체까지 이뤄졌음에도 사인 진상규명 과정에 우리가 넘지 못하는 알수 없었던 벽의 실체를 놓고 고민했던 단상을 지역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내창 형의 죽음은 캠퍼스를 떠나온 뒤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내 삶에 8월이라는 시간과 함께 강한 규정력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개인적 연이 없는 그의 죽음이 나에게 무슨 작용을 한 것일까? 80년대를 내달렸던 이땅의 청년학생으로서 변혁을 향한 의분과 열정 말고도 그 무엇이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마도 군 제대 후 예비역으로 비슷한 나이에 늦깎이 운동에 뛰어들었던 공통점, 그리고 조소과 실기동 건축추진 등 학우들의 관심사를 통해 학생회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했던 그의 활동 등에서 남다른 동질감과 부채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창이형이 복무했던 군 부대도 나와 같은 사단 소속이었다.


지금도 광주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운구행렬을 가로막는 관제데모꾼과 대치하면서 내창이형 시신을 부여잡고 가을밤을 지새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렵게 망월동에 형을 모신 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비쳐진 가을풍경이 왜 그리도 쓸쓸하던지...이듬해 흑석동 교정 등록금 투쟁집회 현장에서 늦은 저녁 집회대오가 흐트러지려하자 ‘지난해 가을 광주 진입로에서 내창이 형의 시신을 부여잡고 온밤을 지새우던 일을 잊지말자’며 분위기를 추스렸던 기억이 새롭다.


다시 8월이 다가온다.

해마다 8월이 오면 찾아왔다 떠나가는 이름 이내창.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와 내가 조우할 날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때 뜨거운 8월을 함께했던 학우들도 이제 각자 생활의 현장이 달라지고 생각도 다양해지고 몇몇은 내창이 형 곁으로 먼저 떠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8월은 이내창이라는 이름과 함께 평생 지워지지 않을 아픔이다. 마치 8.15 광복절이 분단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평생의 아픔을 남겼듯이..

그때 외쳐보았던 구호를 조용히 되뇌어본다.

‘그대 못다한 젊음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