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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와 하나가 되다 -안면도에서(3)

김포대두 정왕룡 2006. 11. 16. 05:23
서해바다와 하나가 되다 -안면도에서(3)

 

정왕룡 시민기자 kd6010@hanmail.net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본다
 설익는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간다’

대학가요제 대상곡으로 널리 알려진 박해수 시인의 ‘바다에 누워’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노래를 들을 땐 느낄 수 없는 외로움의 물결이 하나가득 마음속에 밀려옵니다. ‘잠겨버리는 대상’으로만 알았던 바다에 ‘누울 수 있다’는 시인의 생각은 바다라는 존재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정겨움을 한껏 나누는 오랜 벗의 이미지로 다가오게 만듭니다.

 

‘마음도 / 바다에 누워/ 달을 보고 달을 안고/ 목숨의 맥(脈)이 실려간다
 나는 無心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외로이 바다에 누워/ 이승의 끝이랴 싶다’

 

노래에서는 잘려져 나간 후반부 싯귀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무심한 바다에 누워 ‘달을 안고 꽃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져가고 싶은 시인의 외로움’이 가슴을 저미게 만듭니다. 아무래도 시인의 이러한 정취는 싯귀절 표현대로 ‘해저문 노을’을 바라다 볼수 있는 안면도 해안가에 섰을 때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녁 어둠이 어스름 찾아드는 방포항 포구에 섰습니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있는 듯 건너편 방파제쪽에는 공사에 여념이 없는 덤프트럭 행렬이 줄지어 드나듭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포구에 닻을 내린 어선들은 이제 불을 밝히기 시작한 가로등을 벗삼아 달콤한 휴식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방파제쪽의 덤프트럭 행렬과 눈앞의 어선들을 보면서 개미와 배짱이 우화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이 순간만은 개미의 근면함보다는배짱이의 나른함과 여유가 더 매력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해변은 해변다워야 하고 밤바다는 나처럼 그에 어울리는 풍경이 있어야 한다’며 덤프트럭앞에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어선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 합니다.

 

포구의 벤치에 앉아 대하 한접시를 시켜놓고 아이와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버렸습니다. 몇시간 안되는 여행길이었지만 아이에게는 피곤한 여정이었나 봅니다. 숙소에 돌아오자 마자 TV를 켜는가 싶더니 어느새 엄마곁에 누워 쌔근 쌔근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아이의 평화로운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다가 아이의 꿈속으로 들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편지를 써내려갔습니다.

   

누리야.
바깥에서는 안면도의 파도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데 엄마와 함께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기분이 어떻니? 누리에게 참 오랜만에 편지를 써본다.
우리 꼬마 아가씨가 아기적에는 아빠가 참 편지를 많이 썼는데 커가는 과정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해져 버린 것 같구나. 그래도 아빠를 넉넉히 이해해주면서 무럭 무럭 커가는 우리 누리에게 아빠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구나. 오늘 오후 늦게 도착한 안면도 해변을 보며 누리가 기뻐하는 모습에 아빠도 참 기분이 좋았단다.


방파제 바로 옆에서 대하를 먹으며 추운 바닷바람에 엄마와 같이 침낭을 둘러 맬 때는 기분이 좋든? 그저 엄마는 누리가 기분좋고 씩씩하면 얼굴이 밝아지는구나.

벌써 자정을 넘어섰구나.
아빠는 방금 전 엄마 곁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누리를 놔두고, 베란다에 나가 창밖의 밤바다를 바라보았단다. 아까 도착했을 땐 해안도로에 바짝 붙어서 손짓하던 파도물결이 한참이나 멀어져 있고, 누리네 학교 운동장보다 수십 배는 넓어 보임직한 백사장이 밤안개 사이로 희뿌옇게 펼쳐져 있더구나.

 

아빠는 서해바다에 올 때마다 밀물 썰물의 움직임 속에서 드러나는 백사장이나 갯벌의 규모에 새삼 놀라곤 한단다. 조수간만의 차가 거의 없는 동해바다와 달리 서해는 해안선의 변화무쌍함이 참 매력적 요소란다. 사람들이 밀물만 주목한다면 그 아래 감추어져 있는 저 거대한 백사장을 생각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 같구나. 


 썰물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백사장에 환호하며 달려가기 보다 밀물 때에도 눈에 드러나지 않는, 물결아래 세계와 대화를 나눌 줄 아는 넉넉한 시야를 가진 누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빠, 또 글 쓸거지? 이번엔 ‘서해바다와 하나가 되다’, 이런 제목 어때?”
안면도로 내려오는 길에 누리가 아빠가 쓸지도 모를 글에 대해 미리 제목을 지어주던 일 기억나니? 글쎄, 아빠의 볼품없는 글이 누리의 관심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직접 제목까지 앞서서 지어주니 아빠는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바다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도 없을거다.
특히나 우리처럼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사회에서는 ‘하나됨’의 의미가 진짜 소중할거 같구나. 이번 가족여행을 계기로 엄마와 아빠, 그리고 우리 누리가 함께 하나가 되어 멋진 화음을 만들어 보지 않을래?

 

‘하나가 된다는 것’이 모두가 한가지 색깔을 갖추는 것을 뜻하는게 아닌 것 알지?
일곱색깔 무지개처럼 각자가 자기 색채를 가지면서도 함께 어우러질때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소중한 하나됨’을 만들어 보자꾸나.

이런,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겨버렸네?
아빠도 졸음이 밀려온다. 날이 밝으면 우리 꼬마 아가씨는 또 어떤 말씨로 아빠를 놀래키려나? 안뇽. 아빠도 이제 우리누리 옆에서 잠을 청해야겠다.

 

입력 : 2006년 11월 15일 17:34:54 / 수정 : 2006년 11월 15일 17: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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